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 부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저축은행들을 지원하기 위해 예금자보호법을 개정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금융권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지만 제대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예금자보호법은 금융기관이 부실화돼서 예금을 상환할 수 없는 사태를 대비해 예금보험기금에 보험료를 적립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최악의 경우 은행이 문을 닫더라도 고객들은 원금과 이자를 합쳐 최대 5천만원까지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런데 지난달 24일 한나라당 이사철 의원 등이 최근 발의한 예금자보호법 개정안은 은행과 금융투자회사, 생명보험사, 손해보험사, 종합금융사, 저축은행 등 6개 권역으로 구분된 예금보험기금을 통합해 공동 계정을 추가 조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개정안은 저축은행의 누적적자를 충당하기 위한 것으로 공동 계정을 조성하면 은행과 생명보험사 등에서 조성한 기금으로 저축은행을 지원할 수 있게 된다.
전국금융노동조합은 성명을 내고 “개정안은 예금자 보호를 위해 사용돼야 할 예금보험기금을 부실 저축은행에 쏟아붓는 건 이 법의 당초 취지인 예금자 보호와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저축은행 부실의 책임을 전체 예금자에게 전가하는 파렴치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지금까지는 예금보험기금이 권역별로 계정이 구분돼 있기 때문에 저축은행들이 부실을 메우려면 다른 권역 계정에서 차입을 해야 했지만 개정안이 통과되면 차입할 필요가 없게 된다.
금융노조는 “예금보험기금이 10월 말 기준으로 10조3천억원이 적립돼 있지만 이 가운데 저축은행 계정의 보험료 수입은 2400억원 밖에 안 되고 저축은행들이 예금보험기금에서 빼 간 돈은 4조9천억원이 넘는다”고 지적했다. 금융노조는 “내년 저축은행의 추가 부실규모가 약 3조9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데 개정안이 통과되면 예금보험기금 거의 전부(94%)를 저축은행 부실채권 매입에 쏟아 붓는 꼴이 된다”고 지적했다.
금융노조는 “예금보험기금을 공동계정으로 한다는 건 매우 무책임한 발상으로 결국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가 된다”면서 “저축은행이 먼저 예금보험기금을 탕진하고 나면, 뒤에 오는 사람은 먹을 게 없게 된다”고 강조했다. 금융노조는 또 “이런 도덕적 해이를 방치하면 그동안 경쟁하듯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에 투자해 손실을 키웠던 과거의 잘못된 행태를 고치지 않을 것이며, 공동계정은 부실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고 강조했다.
금융노조 양병민 위원장은 또 “저축은행의 부실은 금융감독 부실의 결과”라면서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 구조를 개선하는 금융당국의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위원장은 “예금보험기금을 허물기 전에 정부 보증채 발행 등 공적자금 투입이 순리”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사철 의원실 관계자는 “저축은행의 부실을 왜 다른 권역으로 전가하느냐는 금융권의 반발이 있는 걸 알고 있지만 무작정 공적자금에 기대기 보다는 업계의 자구 노력이 중요하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영국에서도 공동 계정을 도입한 사례가 있다”면서 “업계 이기주의보다는 금융시장 전체의 안정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법안의 취지를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금융노조에 따르면 스페인의 경우 정부 일반예산 75%와 예금보험기금 출연금 25%로 구조조정기금을 마련하고 추가적인 기금은 정부보증채 발행 등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다. 금융노조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예금보험기금 지원은 최소화해야 하며 대주주와 경영진의 책임 분담금을 사전에 요구하고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 구조를 개선하는 등의 제도적 보완장치가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