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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 여대생 장기 적출 괴담, 알고 보니….

Written by leejeonghwan

March 3, 2013

지난 21일 세계일보와 한국일보, 헤럴드경제, 이데일리 등이 보도한 중국 여대생 콩팥 적출 사건은 사실 영어권에서는 잘 알려진 오래된 ‘도시 괴담(urban legend)’이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떠도는 출처 불명의 낚시질에 한국 언론사들이 단체로 낚였다고 할 수 있다.

세계일보가 “만취 여대생, 일어나보니 콩팥 도난 당하고…”라는 제목으로 처음 보도한 이 사건은 파티에 간 여대생이 잘 생긴 남자와 술을 먹다가 정신을 잃고 깨어났더니 콩팥이 사라졌더라는 내용이다.

정황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호텔 방에 가서 와인을 마시다가 몽롱하고 어지러워 잠에 들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얼음이 가득 담긴 욕조 안에 누워 있었고 욕조 근처에 붉은 글씨로 쓴 메모가 붙어 있었다.

“(중국의 119) 120으로 연락해라. 안 그러면 너는 죽게 된다!”

전화를 걸었더니 의사가 등을 살펴보라고 말한다. 등에 찢긴 상처가 있다고 했더니 “그대로 누운 채 움직이지 말라”면서 응급의료팀을 보내겠다고 한다. 콩팥 두 개를 모두 적출당한 이 여대생은 며칠 뒤 숨졌다.

이 기사는 같은 날 오후 한국일보가 “여대생, 술 깨보니 욕조에 담긴 채… 섬뜩”이라는 제목으로 베껴 쓰고 이날 저녁 헤럴드경제가 “만취 여대생, 잠든 사이 콩팥 사라진채… ‘경악'”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베껴 쓴다. 그리고 이틀 뒤 이데일리가 “만취 여대생, 일어나 보니 욕조에 담긴 채 ‘콩팥 도난'”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베껴 쓴다.

복제를 거듭하면서 기사는 조금씩 살이 붙는다. 헤럴드경제는 “법의학자들에 따르면 술과 강력한 환각성분의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얼음물에 담겨 장기를 적출당하면 피해자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이데일리는 “장기매매 범죄조직은 매우 광범위하며 고도로 숙련된 이들이 젊은 여성이나 관광객을 주 대상으로 삼아 범행을 저지른다”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 글을 널리 퍼트려 달라”는 당부의 글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 기사의 출처는 페이스북이다. 작성자는 ‘필리핀 내셔널 디펜스 이니셔티브(Philippine National Defense Initiative)’라고 돼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의 글은 삭제되고 없는 상태다. 세계일보 등은 필리핀의 정치단체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정작 이 단체의 페이스북 페이지는 개설된 지 한 달도 채 안 됐고 페이스북이 아닌 어디에서도 이 단체의 소개를 찾아볼 수 없다. 페이스북 ‘좋아요(like)’ 수도 59건 밖에 안 된다.

2009년에 출간된 ‘Made to Stick’에 이 유명한 도시 괴담이 자세하게 소개돼 있다. 칩 히스 스탠퍼드대 교수가 쓴 이 책은 우리말로 하면 ‘딱 달라붙는’ 정도의 의미다.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여러 이야기들의 유형을 정리한 책이다. 한때 뉴욕타임즈 선정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책으로 국내에도 번역 출간돼 있다.

도입부에 소개된 장기적출 괴담의 원문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데이브라는 이름의 남자가 있다고 하자. 데이브는 애틀랜틱시티에 출장을 와서 중요한 미팅을 끝내고 바를 찾았다. 그때 한 매력적인 여성이 다가와서 그에게 술을 사겠다고 한다. 그녀가 건넨 술잔을 받아든 게 데이브의 이날 마지막 기억이었다.

깨어났을 때 그는 얼음으로 가득 찬 욕조에 누워있었다. 무슨 일인지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메모가 눈에 들어온다. “움직이지 말고 911에 전화해.”

전화를 걸어 상태를 설명하자 안내원이 묻는다. “혹시 허리 쪽에 튜브가 튀어나온 게 있나요?” 허리를 만져보니 정말 있다. 그렇다고 말했더니 안내원이 말한다. “놀라지 마세요. 당신의 콩팥 하나가 사라졌을 겁니다. 요즘 돌아다니는 장기적출단 소행 같습니다. 의료진을 보낼 테니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그대로 계세요.”

히스 교수는 이 짧은 이야기를 “지난 15년 동안 가장 성공한 도시 괴담”이라고 소개한다. 이 이야기는 수백 가지의 다른 버전이 있는데 세 가지 포인트는 동일하다. 첫째, 약을 탄 술, 둘째, 얼음으로 가득 찬 욕조, 그리고 콩팥 적출이다. 이 이야기는 굉장히 강렬하면서도 기억하기 쉽다. 이런 이야기 들어봤어? 친구들에게 담배 피우면서 이야기하기도 좋다. 매력적인 이성과의 술 한 잔, 어딘가 실제로 있을 법한 일이면서도 끝없이 공포를 자극하는, 그야말로 ‘딱 달라붙는(move to stick)’ 이야기다.

히스 교수는 이 책에서 성공하는 이야기의 여섯 가지 조건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 Simple(간단하게), 둘째, unexpected(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셋째, concrete(구체적으로), 넷째, credible(믿을 만하게), 다섯째, emotional(감정에 호소해서), 여섯째, stories(이야기)로 풀어내라는 것이다. 장기적출 괴담은 이 여섯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최고의 낚시질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조금만 살펴보면 이런 괴담이 말 그대로 괴담일 뿐이라는 걸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장기라는 게 적출한 뒤 곧바로 이식하지 않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큰 데다 이식 대상자와 거부 반응이 없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장기를 떼서 냉동 보관했다가 나중에 이식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얼음이 가득 찬 욕조라는 설정도 그로테스크하긴 하지만 이제 막 수술이 끝난 사람을 욕조에 담궈 둔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더 말이 안 된다. 왜 콩팥만 떼내 갔느냐는 의문도 가능하고 119 안내원이 전화를 받자 마자 알아차렸다는 것도 극적인 효과를 노린 설정일 가능성이 크다. 영화 ‘아저씨’에서처럼 장기 밀매조직이 다수의 장기 적출 후보자를 확보한 상태에서 적당한 이식 대상이 나타나면 동시에 수술을 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 막무가내로 길 가던 취객의 콩팥만 털어가는 경우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재미있는 건 이런 해프닝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미 매일경제가 2011년 7월 “‘미녀와 술마시다 신장 적출당했다’ 괴담 진실은?”이라는 제목으로 이 도시괴담을 소개한 바 있다. 매일경제는 “지난 1990년대 후반 북미 지역에서 이미 한차례 유행처럼 퍼져나간 것”이라며 “당시 이메일을 통해 `여행자 주의사항`이라는 제목으로 확산됐으며 생생한 묘사와 설정 등으로 몇몇 마케팅 관련 서적에서는 모범사례로까지 꼽는 내용”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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