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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캐스트, 바보상자에 스마트폰의 두뇌를 이식하다.

Written by leejeonghwan

August 12, 2013

요즘 구글은 스마트 안경도 만들고 무인 자동차도 만들고 심지어 인조 쇠고기까지 만든다. 구글이 안 만드는 게 뭐가 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지만 지난달 24일 출시한 크롬캐스트는 가장 핫한 물건이다. 넷플릭스 3개월 이용권을 포함해 35달러라는 파격적인 마케팅 이벤트 덕분에 출시 첫날 매진이 됐다. 프리미엄이 붙어 이베이에서는 100달러 이상에 팔리기도 하고 아마존에서는 지금 주문하면 10월에나 받을 수 있다는 루머가 나돌 정도다.


크롬캐스트는 USB 메모리처럼 생긴 스마트 TV 셋톱박스다. 크롬캐스트를 TV 뒷쪽 HDMI 포트에 꽂으면 와이파이 네트워크를 통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노트북 컴퓨터 등으로 구동시킬 수 있다. 스마트폰이 리모컨이 되는 셈이다. 스마트폰의 비좁은 화면이 TV로 확장됐다고 볼 수도 있고 바보상자 TV에 스마트폰의 두뇌를 연결했다고 볼 수도 있다. 소파에 앉으면 느껴지는 TV와의 거리감을 스마트폰이 좁혀준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크롬캐스트가 스마트폰 화면을 그대로 TV에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크롬캐스트는 CPU와 메모리, 네트워크 기능을 갖춘 어엿한 컴퓨터다. 2GB의 낸드 플래쉬 메모리와 512MB의 SDRAM이 장착돼 있다. 스마트폰을 통해 명령을 내리면 크롬캐스트가 URL을 받아 직접 와이파이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콘텐츠를 재생한다. 미러링 방식이 아니라 클라우드 기반의 스트리밍 방식이다.

미러링 방식이 아니라는 건 스마트폰 안에 들어있는 동영상이나 음악 파일을 재생할 수 없다는 의미다. 유튜브나 넷플릭스 등 웹에 올라있는 파일을 스트리밍 방식으로 불러오는 것만 가능하다. TV에서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동안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다른 파일을 찾는 등 멀티 태스킹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편리하다는 평가도 있겠지만 미러링이 안 돼서 아쉽다는 평가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MP3 파일을 스마트폰에 집어넣는 것보다 벅스나 멜론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게 훨씬 편리하다. 동영상 파일도 마찬가지다. 저장용량이 가득차서 비워야 할 때도 있고 코딩 방식이 달라서 해상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 미러링을 동시에 지원했으면 좋겠지만 클라우드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이야기다. 미러링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스마트폰 배터리가 빨리 닳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이다.

크롬캐스트를 받아보면 확인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여러 대의 스마트폰으로 동시에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쉽게 풀렸다. 같은 와이파이 네트워크 안에 있으면 어떤 스마트폰이든 크롬캐스트를 조작할 수 있다. 이를 테면 가족들이 저마다 TV 리모컨을 하나씩 들고 있다고 상상하면 된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이나 와이파이만 된다면 모든 노트북이 리모컨이 될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유튜브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등에서는 유튜브 앱을 띄워 크롬캐스트 버튼을 누르면 스마트폰에서 볼 건지 크롬캐스트로 볼 건지를 선택할 수 있다. 노트북에서는 크롬 브라우저로 크롬캐스트에 접속된 상태에서 유튜브 동영상을 재생하면 자동으로 TV 화면에 뜬다. 크롬 브라우저가 PC 기반에서는 미러링 방식으로 작동되는데 유튜브 동영상이 재생될 때만 클라우드 스트리밍 방식으로 바뀐다는 이야기다.

전반적으로 인터페이스도 깔끔하고 디자인도 비교적 만족스럽다. 반응 속도도 비교적 빠른 편이다. 아직까지 크롬캐스트를 지원하는 앱은 유튜브와 넷플릭스, 구글 플레이, 그리고 크롬 브라우저 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넷플릭스와 구글 뮤직 등이 서비스되지 않는다. 결국 얼마나 많은 앱이 크롬캐스트를 지원하느냐가 성공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는 푹이나 티빙 등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들이 관심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크롬 브라우저는 스마트폰 버전에서는 작동하지 않고 PC 버전에서만 지원된다. 크롬 브라우저 오른쪽 상단에 뜬 크롬캐스트 버튼을 누르면 크롬 브라우저에 뜬 화면을 그대로 TV에 뜨도록 할 수 있다. 화면을 그대로 전송하는 게 아니라 크롬캐스트에서 다시 접속하는 방식이라 1~2초 정도 화면이 늦게 뜨게 된다. 스마트폰 버전을 지원하지 않는 건 아마도 해상도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스마트폰의 비좁은 화면을 TV에서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TV로 웹 사이트를 볼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경험이지만 한 번 접속해 보는 것 이상의 큰 효용은 없다. TV는 PC가 아니고 또 가까운 스마트폰이 있는데 굳이 PC로 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연 시간이 있어서 프레젠테이션 용도로도 적당하지 않다. 크롬 브라우저에서 푹이나 티빙에 접속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역시 지연 시간 때문에 답답하다. 이런 것도 된다는 정도 이상의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 앱 차원에서 지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듯하다.

TV 의존적 플랫폼의 근본적인 한계도 보인다. 우선 스마트폰이 리모컨을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TV를 보다가 크롬캐스트를 구동시키려면 기존의 리모컨에서 외부 입력 버튼을 누르고 HDMI 입력을 선택해줘야 한다. 스마트폰이 리모컨이 되는 게 아니라 리모컨이 하나 더 생긴 셈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만약 HDMI 포트가 하나 뿐이고 다른 용도로 쓰고 있다면 그때마다 뽑았다 꽂았다 해야 한다. 소파에서 일어나는 순간 이미 진 것이다.

상당히 긱(geek, 괴짜)스러운 물건이라 설치가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HDMI 포트에 꽂고 또 USB 포트에 전원을 연결해줘야 한다. USB 포트가 없는 TV라면 좀 난감할 수도 있다. 구글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에서는 크롬캐스트 앱만 깔아주면 간단히 설정이 마무리 되는데 애플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등에서는 먼저 와이파이 네트워크를 크롬캐스트와 동기화하는 작업을 하고 나중에 다시 기존의 네트워크로 바꿔주는 작업을 해야 한다.

거실과 안방, 공부방 등 여러 곳의 TV를 바꿔 가면서 쓸 수도 있을까. 이건 쉽지 않다. 네트워크 환경이 바뀔 때마다 와이파이를 다시 잡아줘야 하는데 크롬캐스트는 기존의 네트워크를 계속 찾고 스마트폰은 크롬캐스트에 연결되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 가끔 발생한다. 출장이나 여행 갈 때 들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와이파이가 없거나 와이파이가 있더라도 로그인을 해야 하는 경우는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단점을 감안하더라도 크롬캐스트에 열광할 이유는 충분하다. 일단 스마트폰을 리모컨으로 쓸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돋보인다. 영화를 보면서 관련정보를 찾거나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글을 남기거나 드라마에 등장한 소품을 구매할 수도 있다. 특히 대형 스포츠 이벤트나 정치 시즌에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크롬캐스트는 스마트TV를 넘어 이른 바 소셜TV를 가능하게 한다.

아직은 유튜브 클립을 이것저것 실행시켜보는 것 말고 딱히 쓸모가 없지만 푹이나 티빙 등이 크롬캐스트를 지원하기 시작하면 게임의 양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 푹에 가입하면 월 2900원에 지상파 방송을 스트리밍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월 5900원이면 다시 보기 서비스도 무제한 지원된다. 푹은 그동안 PC나 모바일에서만 서비스됐는데 이제 TV로 치고 들어올 기세다. 케이블보다 훨씬 싸고 또 훨씬 편리하다.

푹이나 티빙, 콘텐츠 사업자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되겠지만 삼성전자나 LG전자 같은 TV 제조업체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TV는 크롬캐스트를 지원하고 있기도 하고 아예 크롬캐스트가 내장된 TV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구글의 콘텐츠 플랫폼이 고스란히 TV로 옮겨갈 수도 있다. 구글이 이미 유튜브라는 세계 최대의 콘텐츠 플랫폼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뉴스타파나 국민TV 등이 크롬캐스트를 후원회원들에게 배포하는 모델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35달러 소매가격 기준으로 해도 2년 약정이면 월 1500원 수준이면 된다. 실제로 TV로 보는 HD급 화질의 뉴스타파는 SD급 종합편성채널보다 훨씬 더 선명했다. 스마트폰 앱과 병행할 경우 효과가 배가될 것으로 보인다. 크롬캐스트 실행 버튼과 함께 프로그램 정보와 취재 후기, 독자들 리뷰와 제보를 받는 시스템을 하나로 통합한 앱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지만 크롬캐스트가 대중적인 플랫폼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인지는 아직 확신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크롬캐스트가 실패하더라도 TV와 인터넷의 결합, N-스크린을 지원하는 새로운 서비스가 쏟아져 나올 거라는 사실이다. 바보상자 TV는 이제 새로운 진화 단계에 들어섰다. 온갖 다양한 형태의 스마트TV가 가능하겠지만 한동안 크롬캐스트가 그 변화를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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