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씽킹, 기자들처럼 생각하고 기자들처럼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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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인물과사상에 “이정환의 미디어 전략 강좌”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는 글입니다. 2019년 4월호에 실린 3편입니다.)

청와대 국민 청원에 올라왔던 두 건의 글이 있다.

“제 친구가 공정한 심사를 받아 난민으로 인정받게 해 주세요.”

첫 번째 글은 지난해 7월, 중학생들이 올린 글이다. 이란에서 태어난 A군은 일곱 살에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천주교로 개종을 했는데 이란에 돌아가면 반역죄로 몰려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난민 신청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행정소송을 걸어 1심에서 승소했지만 2심과 3심에서 패소해 강제 추방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법원의 논리는 이란으로 돌아가더라도 단순히 개종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 받지는 않을 것이고 애초에 열네 살이란 나이는 종교적 신념을 갖기에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려고 개종한 척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폭염이 기승을 부렸던 지난해 여름, A군의 친구들은 날마다 청와대를 찾아가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청와대에 청원을 올렸다.

“제 친구는 신분증도 빼앗기고 출국 날짜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도 친구가 떠나는 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이 떨립니다. 우리 국민 마음 속에 정의가 남아 있다면 제 친구를 굽어 살펴줄 것이라 믿습니다. 부디 제 친구가 난민이 되어 이란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제 친구의 안전을 지켜주십시오. 간절히 호소합니다.”

공감 또는 분노, 우리가 열광하는 이야기들.

청와대 국민 청원은 20만 명이 넘어야 답변을 하게 돼 있지만 이 글은 3만 명을 조금 넘기는 데 그쳤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이 중학생 친구들의 이야기가 널리 확산됐고 언론이 관심을 보이면서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나섰고 심사를 다시 신청해서 인정을 받았다.

실제로 A군이 이란에 돌아가더라도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을 하지 않는 이상 처벌을 받게 될 가능성은 낮다. 다만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은 나라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건 그 진정성을 따져볼 수는 있겠지만 난민 인정을 요청할 사유가 충분히 된다. A군의 친구들이 쓴 이 글에는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다. 중학생 친구들의 따뜻한 우정과 이를 끌어안을 줄 아는 관대한 사회,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열광한다. A군의 친구들은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이 떨린다면서도 난민 심사가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했고 어른들에게 정의를 호소했다.

더욱 놀라웠던 건 A군이 가까스로 난민 인정을 받은 다음에 이 중학생들이 올린 글이다.

“이름은 잊혀지고 사건은 기억되어야 합니다. (중략) 이제 우리는 우리의 친구가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고 일상으로 돌아가 편안한 삶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이란 친구뿐 아니라 그를 돕는 우리 학생들 모두 같은 이유로 잊혀지기를 원합니다. 다만, 여전히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많은 사람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이번 일련의 과정은 기억되어야 합니다. 이제 시작인 난민인권운동의 작은 이정표인 탓에, 팍팍하고 각박한 우리 사회에 던지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위대한 첫 발자국인 탓에, 여전히 세상의 어둠 속에서 빛을 찾고 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의지할 희망의 한 사례가 되는 탓에.”

이 글은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을 일깨운다. A군은 다행히 남게 됐지만 여전히 한국의 난민 인정 비율은 4% 수준이다. 한국은 1992년 난민 협약에 가입한 이래 지난해 6월까지 4만2009명의 신청자 가운데 849명만 난민으로 인정했다. 세계 평균은 38%다. 인구 1000명당 난민 수용 인원은 세계 139위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문제는 A군이 아니라 수많은 A군과 그들의 가족들이다. A군의 친구들이 사건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한국 사회가 이 사건을 하나의 에피소드로 흘려 보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글은 이에 앞서 지난해 6월 청와대 국민 청원에 올라왔던 제주도 예멘 난민의 추방을 요청하는 글이다.

“제주도 불법 난민 신청 문제에 따른 난민법·무사증 입국·난민신청허가 폐지 및 개헌을 청원합니다” 이 글에는 무려 71만 명이 공동 청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중학생들은 친구를 난민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는데 어른들은 난민들을 모조리 내쫓고 아예 법을 폐지해 달라는 청원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제주도에 난민 유입이 늘어나면서 치안을 비롯해 사회적 문제가 급증했다”는 차별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섬에 갇혀 있으니 예멘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는 허위 발언이 나돌기도 했고 난민들이 집단 성폭행을 모의하고 있다거나 난민 1명당 혈세 138만 원을 지원하고 있다거나 서울대에서 이슬람 학생들이 수업 중에 큰 소리로 기도를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는 등의 가짜 뉴스가 나돌면서 혐오를 부추겼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무슨 난민이냐, 수백만 원씩 브로커 비용을 냈다던데 이런 사람들을 받아도 되냐 등등 난민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와 다르다는 이유로 감정적인 비난을 쏟아내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기자들처럼 생각하고 기자들처럼 써보자.

한국 사회의 많은 이슈가 그렇지만 난민 문제는 모두가 자기주장만 늘어놓을 뿐 정작 깊이있는 토론도 어떤 합의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 일련의 사건에서 여론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몇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강제 추방돼 사형 당할 운명의 난민 친구를 위해 중학생들이 국민 청원에 나섰다”는 건 이야기가 된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비자 없이 체류할 수 있게 허용한 뒤로 제주도에 외국인 불법 체류와 난민 신청이 늘었다”는 것도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이야기가 된다는 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실제로 현실을 바꾸는 힘을 갖게 된다는 의미다.

뉴스가 넘쳐나는 시대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이야기에 반응한다. 나는 효율적인 메시지 전략의 하나로 기자들처럼 생각하고 기자들처럼 쓸 것을 제안한다. 새로운 사실과 강력한 메시지, 사회적 의미를 담아야 한다. 메시지를 집약하고 핵심을 압축하는 것이 관건이다. 나는 이것을 ‘저널리즘 씽킹’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잊혀지고 사건은 기억돼야 한다”는 글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일깨우는 좋은 글이다. 반면 “난민들이 진정한 난민들일지도 의문이 든다”거나 “자국민의 치안과 안전을 먼저 챙겨 달라”는 글은 메시지는 차별을 선동하는 문제가 많은 글이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기자라면 절대 이런 글을 쓸 수 없다.

만약 제주도 한 달 무비자 입국이 문제라면 그것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랬다면 71만 명이나 동의를 끌어내기 어려웠을 수도 있지만 과거 말레이시아로 넘어 갔던 중동계 난민들이 그나마 가장 진입이 쉬운 한국으로 밀려들어오고 있다는 지적은 사실에 부합한다. 난민 신청자가 난민법 시행 이전인 2012년 1143명에서 2017년에는 9942명으로 크게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난민 인정 비율은 1% 남짓이지만 난민 신청을 하고 나면 심사 기간 동안 체류 자격을 부여 받기 때문에 말레이시아-제주도 루트를 선호한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 무렵 인터넷 매체 직썰에서 올린 패러디 만화의 몇 토막을 소개해 본다. 한국에서 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한국 사람들이 집단 난민이 돼서 세계를 떠돌게 된다. 그때 외국에서 이런 루머와 가짜 뉴스가 떠돌 거라는 내용이다.

“한국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는 민족이야. 그 사람들 받아주면 우리 반려견을 다 잡아먹을 거야.”

“한국 남자들은 모두 군대에서 혹독하게 훈련 받은 살인 병기들이야. 한국인들은 전역 후에도 매년 살인 병기 훈련을 받는대. 다들 징집된 총기 전문가들이라 수틀리면 언제든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한국 사람들은 돈독이 바짝 올라 있어서 야근에 특근에 주말 출근까지 시키는대로 뭐든 한다고. 그런 사람들 떼로 몰려오면 우리 일자리 다 뺏기는 거야.”

가벼운 패러디지만 사실과 부합하는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다. 한국 난민을 대규모로 수용하면 그 나라 사람들 일자리가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든 안 들고 다니든 개고기를 먹든 안 먹든 그런 문화적 차이가 난민의 자격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철조망을 뚫고 총알을 피해 도망쳐 와야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한다.

만약 기자들이라면 여기서 또 끌어낼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청와대 국민 청원 답변에 나와서 “난민 신청을 할 때 소셜 미디어 계정 제출을 의무화하는 등 신원 검증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힌 건 명백한 인종 차별이다. 예멘에 한정해서 무비자 입국을 금지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상식의 배반,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것.

‘저널리즘 씽킹’은 지금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 것인지 찾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본질인지 묻고 답을 찾는 과정이다. 국민 청원이 71만 명이 넘어서 청와대가 답변을 했다면 답변 내용을 요약하고 전달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무엇이 왜 문제인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예멘이 문제라서 무비자 입국을 금지했다면 다음에 파키스탄이 문제가 될 때 파키스탄을 또 금지시킬 것인가? 문제인 것과 문제가 아닌 것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국가 정책을 이렇게 다수결이나 여론의 움직임으로 재단해도 되는 것일까? 난민을 끌어안자는 게 아니라 불편한 이슈를 전면에 드러내놓고 토론을 하고 답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자 한 기자가 물었다. “기준이 무엇인가? 자의적으로 결정한 것 아닌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 열사의 서훈 등급을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고 국무회의에서 유관순 열사가 상징적인 인물인만큼 이번 기회에 상향 조정하기로 결론이 난 것이다. 김구·안창호·안중근은 1등급(대한민국장), 신채호 등은 2등급(대통령장)인데 유관순 열사만 3등급인 건 격에 맞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다.

그러나 여전히 독립투사와 순국열사들 가운데서도 3등급 이하의 서훈을 받은 분들이 많다. 단순히 더 유명하거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해서 더 큰 훈장을 받아야 한다는 건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유관순 열사가 1등급 훈장을 받는다는 데 반대할 국민은 거의 없겠지만 과연 이런 줄 세우기가 맞느냐는 지적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임시 정부 초대 국무령을 냈던 이상룡 지사는 여전히 3등급이다. 이상룡 지사의 유족들이 요청하면 등급을 올려줄 것인가?

이 기자는 “국민 청원을 하고 여론을 만들면 서훈을 격상해 준다는 잘못된 선례를 만든 것”이라면서 “인기투표라는 비판도 나올 것”이라고 지적했지만 정작 기사로 내지는 않았다. (당시 현장에 있던 미디어오늘 기자가 당시 상황을 기사로 냈다.) 기자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 읽고 싶은 것만 찾아 읽지만 이런 불편한 질문이 세상을 바꾼다.

당연한 것을 의심하고 뒤집어 볼 것.

저널리즘(journalism)의 어원은 라틴어 ‘디우르나(diurna)’에서 왔다고 한다. 영어로 하면 ‘diary(일기)’고 프랑스어로는 ‘journal’인데 여기에 접미사 ‘-ism’이 붙어서 저널리즘이 됐다. 저널리즘은 저널의 정신이고 뉴스의 선택 뿐만 아니라 가치 평가와 관점과 해석을 아우르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저널리즘이 뭐냐고 묻는다면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 진실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답을 하겠다. 저널리즘은 진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널리즘 씽킹’을 하라는 건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핵심인지 명확하게 짚고 이게 왜 중요한지, 그리고 이걸 어떻게 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논리적인 사고를 하라는 이야기다. 기자들처럼 생각하고 기자들처럼 사실을 마주하라는 이야기다. 여기에 어떤 새로운 것이 있는가, 무슨 이야기를 더 끌어낼 수 있는가, 당연한 것을 흔들고 의심하고 뒤집어 보고 불편한 질문을 던지면서 본질에 접근하는 게 내가 제안하는 ‘저널리즘 씽킹’ 방법론의 핵심이다.

기자는 사실을 찾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실 가운데 가치를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메시지를 선택하고 의제를 제안하고 설정하는 사람이다. 기자들은 핵심을 전달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소설을 쓰려는 것도 아니고 영화 시나리오를 쓰려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결정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기자들처럼 생각하고 기자들처럼 쓰는 훈련은 핵심에 집중하고 본질에 접근하는 데 도움을 준다.

최저임금 인상 때문에 자영업자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주장이 쏟아질 때 최저임금도 못 주는 자영업자는 망해도 싸다거나 장기적으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거나 최저임금이 아니라 높은 임대료가 문제라거나 최저임금 인상은 바람직하지만 급격한 인상이 문제라는 등의 주장은 모두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나는 뭘 써야될 지 모르겠다는 수습기자들에게 이렇게 조언하곤 한다. 기사가 안 써질 때는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내가 오늘 어디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났는데 말이야. 뭐라고 이야기하더라.” 또는 “최저임금 때문에 신문들이 난린데 내 생각은 말이야.” 아마도 친구가 물어볼 것이다. “매출은 안 늘어나는데 인건비가 오르면 아무래도 부담이 되지 않겠어?”

이럴 때는 익숙한 상식을 뒤집어 보고 진짜 문제가 무엇인가를 찾는 데서부터 시작해 보자. 일단 원인과 결과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은 인구 대비 편의점 수가 두 배 규모다. 일본은 편의점 프랜차이즈 본수가 가맹점주에게 최저수익을 보상해주기 때문에 출혈 경쟁이 있을 수 없다. 철저하게 상권을 분석하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가맹점주를 모집한다. 망해도 본사가 망한다는 이야기다. 한국은 최저임금이 곧 임금이 되지만 일본은 최저임금 보다 높게 형성돼 있다. 편의점 수수료율도 오히려 일본이 두 배 가까이 비싸다. 환율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점포당 매출액이 일본이 한국의 다섯 배에 이른다.

아마도 나라면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망하는 게 당연하지. 최저임금 때문에 망하는 게 아니라 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더라고.”

요약할 수 없다면 아직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강력한 스토리텔링은 ‘엘리베이터 피치(Elevator Pitch)’와도 같다. 엘리베이터 1층에서 10층까지 올라가는 짧은 시간에 누군가를 설득해야 한다면 핵심을 정확하게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 사람을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만나더라도 이 짧은 20초만큼의 몰입을 끌어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요즘은 기자들도 이런 ‘로켓 피치’ 방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강력한 한 방이 있는 스토리텔링, 몰입을 끌어내고 공감을 유도하는 메시지 전략은 단순히 낚시 문법과는 다르다. 핵심을 드러내고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되 풍성한 맥락과 경쾌한 논리 구조를 갖춰야 한다.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시드 필드는 ‘시나리오란 무엇인가’에서 시나리오 쓰기의 첫 단계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것을 피하고 세 문장으로 써보라고 제안한다. 명료하고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줄이고 줄여라. 그리고 소리 내서 읽어 보라는 것이다. 세 문장으로 확 당기는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면 그 시나리오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소리 내서 읽어보라는 건 글의 흐름과 리듬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 문장 쓰기는 메시지 전략의 기본 구성 단계부터 활용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장하준 캐임브리지대학교 교수의 이른바 재벌 활용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이건희가 아니었다면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지금처럼 키울 수 없었을 것이다.
2. 순환 출자는 총수 일가의 지배력을 키우는 수단이지만 순환 출자 덕분에 선도적인 모험 투자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3. 재벌 해체가 능사가 아니라 재벌이 투자와 고용을 창출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강제하는 게 국가 경제에는 더 좋은 일 아닌가?

장하준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도 있다.

1. 재벌 체제를 인정하는 대가로 한국 사회가 삼성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2. 투자와 고용은 필요하면 하는 것이지 하란다고 하는 투자와 고용이 과연 사회적 타협이 될 수 있나?
3. 재벌 체제와 주주 자본주의는 대립되는 게 아니라 주주 자본주의의 극단에 재벌 체제가 있다.

사실을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라.

이 세 줄이 안 되면 다섯 줄도 안 되고 열 줄도 안 된다. 이건 흔히 글쓰기 강좌에서 강조하는 첫 문장 쓰기와는 또 다르다.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방향을 명확히 설정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내가 이 시리즈에서 하려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콘텐츠의 패키지가 해체된 시대, 이제 누구나 1000만 독자들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됐다.
2. 정확하게 핵심을 짚고 본질을 파고 드는 ‘저널리즘 씽킹’ 방법론이 필요한 시대다.
3. 강력한 스토리텔링 구조 못지않게 강력한 메시지의 구조를 만드는 훈련을 해야 한다.

다음 연재에서는 구체적으로 메시지 방법론을 이야기해볼 계획이다. 기자들처럼 생각하고 기자들처럼 쓰라고 했지만 사실 기자들도 ‘저널리즘 씽킹’이 안 되는 기자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전달과 객관 보도의 함정에 빠져 메시지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은 사실과 사실이 만나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에 있다. 우리가 보고 듣는 세상의 대부분의 정보가 선택과 집중, 관점과 해석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널리즘 씽킹’은 사실과 사실의 관계를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