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직후 미국에서는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을 파생상품으로 만들어 거래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테러가 발생하면 가격이 오르는 파생상품을 만들면 이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배신자가 나올 것이고 이 파생상품의 가격 추이를 보고 사전에 테러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다.
시장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믿는다. 누군가가 테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투자를 했다면 실제로 테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베팅 규모가 크고 무모할수록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 아이디어는 거의 실현 단계까지 갔다가 막판에 철회됐다.
파생상품의 활용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기본적으로 완벽한 제로섬 시장이기 때문에 이를테면 배럭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 또는 존 매케인 가운데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될 것이냐를 놓고 파생상품으로 만들어 거래할 수도 있다. 예측이 맞으면 돈을 벌고 틀리면 날리는 전형적인 머니게임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이를테면 오바마가 당선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오바마가 당선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오바마의 당선 가능성과 연계된 파생상품을 팔면 된다. 선거 막판에 가까워질수록 이 파생상품의 가격은 오르거나 내려갈 것이다. 오바마가 당선된다면 이 파생상품을 산 사람은 큰 돈을 벌 것이고 이를 판 사람은 투자 금액을 모두 날릴 것이다. 거꾸로 오바마가 낙선한다면 오바마의 파생상품을 판 사람이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파생상품의 매력은 환금성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선거 상황을 지켜보면서 언제라도 사거나 팔 수 있다. 선거 당일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익이 나면 언제라도 이익을 챙기고 빠져 나올 수 있고 손해가 커지면 손절매를 할 수도 있다. 특정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라는 무형의 상품을 사고 팔면서 누군가는 돈을 벌고 누군가는 잃고 누군가는 수수료를 챙긴다.
헤지(방어)가 가능하다는 점도 큰 매력이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만약 공화당이 집권하면 군수물품을 납품하기로 돼 있는 군수사업체라면 메케인의 파생상품을 팔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손실에 미리 대비할 수 있다. 이 경우 공화당이 집권하면 사업에서 돈을 벌고 낙선하면 파생상품에서 돈을 벌게 된다.
최근 세계 주식시장을 얼어붙게 만든 가장 충격적인 소식은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인 AIG가 신용보험상품의 손실 규모를 크게 줄여서 발표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AIG는 미국 현지시간으로 11일 신용부도스와프(CDS)의 자산가치가 지난해 10~11월 48억8천만달러 가까이 줄어들었다고 미국 정부에 보고했다. 지금까지 알려졌던 손실 규모의 4배에 이르는 규모다.
AIG의 불어난 손실은 서브프라임 사태가 여전히 진행형이고 그 끝을 가늠하기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준다.
문제가 된 CDS란 은행이 기업에 대출을 해준 뒤 빌린 돈을 못 갚게 됐을 때 손실보전 계약을 맺은 보험회사가 대신 갚아주는 상품이다. A은행이 B라는 기업에 대출을 해줬는데 B라는 기업이 돈을 갚지 못할 경우 C라는 보험회사가 대신 갚아주기로 계약을 맺는다는 이야기다. CDS 부실은 곧 기업들과 이 기업들에 대출을 해준 은행들의 부실을 의미한다.
이에 앞서 지난 주말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선진 7개국 재무장관 회담에서 흘러나온 서브프라임 부실 규모 전망은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페어 슈타인부뤼크 독일 재무장관은 “서브프라임 관련 세계 금융회사가 입게 될 손실이 4천억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추정하고 있는 1500억달러의 거의 3배에 이르는 규모다.
시장의 공포는 이 천문학적인 규모의 부실이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한다. 금융회사들은 막바지에 가서야 숨겨왔던 부실을 털어놓고 있고 부실은 거침없이 연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서브프라임 사태는 지난 20년 가까이 지속돼 온 금융세계화의 귀결이다. 특히 2000년 이후저금리 기조가 계속되면서 집값이 계속 뛰어올랐고 금융회사들은 부동산 대출을 크게 늘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은 신용이 부족한 사람들까지 이 부동산 투기대열에 끌어들였다. 여기에 파생상품의 함정이 있다.
모기지론 회사들은 대출채권을 묶어 주택저당채권(MBS)을 만들어 팔고 투자자금을 회수하고 빠진다. 그리고 다시 부동산 담보대출을 내준다. 주택저당채권에는 신용도가 높은 대출채권과 낮은 대출채권이 섞여 있다. 이를 테면 부도 확률이 1%인 대출채권과 5%, 10%, 20%인 대출채권이 일정 비율로 섞여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평균 부도 확률이 8%라면 전체 대출 금액의 92% 이하를 지불하고 이 주택저당채권을 사거나 팔게 된다.
만약 집값이 꾸준히 오르는 상황이라면 아무런 문제될 일이 없다. 부도 확률은 8%를 지킬 것이고 대출 금액의 92% 이하를 지불하고 사들인 주택저당채권은 그만큼 차익을 남기게 될 것이다. 문제는 집값이 오르지 않거나 떨어지기 시작하면 대출 채권의 부도 확률이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진다는 데 있다. 10%나 20%의 부도 확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20% 부도 확률의 대출채권 100개 가운데 50개가 부도를 낸다면 이들 대출채권이 포함된 주택저당채권의 부도확률은 8%를 훨씬 웃돌게 된다.
더 큰 문제는 MBS를 묶어 또 다른 파생상품을 만들고 이들이 또 다른 파생상품과 연계돼 부채담보부증권(CDO)이나 CDS 등 완전히 다른 형태의 새로운 파생상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부실 규모를 가늠하기 조차 어렵게 된다는데 있다. 위험을 줄였다고 생각하지만 몇 단계 거치면 이쯤 되면 각각의 단위 파생상품의 확률이라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가뜩이나 지금 미국은 60년 만의 위기라고 할만큼 돌발 변수가 확대돼 있는 상황이다. 한 금융회사의 부실이 다른 금융회사의 부실로 연쇄적으로 파급되고 있다. 일종의 폭탄 돌리기 게임인 셈인데 이미 폭탄은 터지기 시작했고 그런데도 게임을 끝낼 수 없는 상황이다.
오바마와 힐러리, 메케인이 각각 당선될 가능성을 파생상품으로 만들고 이를 국제 유가와 연계하고 이를 다시 우리나라의 부동산 가격이나 과테말라의 옥수수 가격과 연계하고 베네수엘라의 테러 발생 가능성과 상관관계를 다시 한번 유동화시키고 나면 오바마의 당선이 이 파생상품에 미칠 나비효과를 짐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누군가는 돈을 벌 것이고 누군가는 잃을 것이고 누군가는 수수료를 챙길 것이다. 세계 경제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거대한 머니게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지분형 아파트는 정확히 서브프라임의 닮은 꼴이다. 우리나라가 그나마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자유로운 것은 우리나라 금융 기관들의 해외 투자가 많지 않았고 특히 역설적으로 파생상품 투자에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담보대출은 아직 총부채상환비율(DTI)이나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의 규제를 받고 있지만 지분형 아파트는 이마저도 무력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인수위원회는 미국의 몰락을 아직도 강 건너 불 구경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서브프라임 사태는 시장이 비이성적으로 과열될 수도 있고 과열이 지나치면 붕괴할 수도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준다. 이명박 정부가 서브프라임 사태와 세계적인 경제 불안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만 있더라도 지분형 아파트를 다시 거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무조건 감싸고 도는 보수·경제지들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