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자유무역협정(FTA) 조기 비준을 위한 정부와 여당의 막판 밀어 붙이기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의도가 관세 인하 또는 철폐가 아니라 상대 국가에 미국 제도를 이식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24일 금융경제연구소 포럼에서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은 “관세를 인하 또는 철폐하면 우리나라도 수출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지만 정작 문제는 미국 제도가 들어오고 그것이 역진 불가능하다는데 있다”고 지적했다.
정 전 비서관은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 제약산업이 가장 발달한 미국이 왜 약값이 가장 비싼가 생각해 보라고 반문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동아제약의 연구개발 투자는 미국 화이자의 15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제약산업이 개방되면 미국 기업을 차별화할 수 없게 된다. 특허 기간이 연장되고 저작권 보호가 강화되면 제네릭 약품 판매에 의존하던 우리나라 제약산업은 송두리째 미국에 먹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뜩이나 이명박 정부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와 민간 의료보험 활성화를 의료 산업화라는 명목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은 돈을 더 내고 더 좋은 서비스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헌법재판소는 2002년 건강보험 강제 가입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정 전 비서관은 “만약 헌재 재판관들이 모두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했을 때도 그들이 합헌 판결을 내릴 것 같으냐”고 반문한다.
한미FTA는 자동차 수출을 늘리겠지만 당장 약값 폭등과 의료비 지출 확대를 불러올 전망이다. 정 전 비서관은 묻는다. “감기 약값이 10만원으로 치솟고 맹장 수술이 100만원이 되고 4인 가족 의료보험료가 500만원으로 치솟게 되면 그때 가서 건강보험을 확대하거나 되돌리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미국 제약회사들이나 보험회사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당장 투자자 국가 소송을 제기하고 수천억원의 손해 배상을 받아낼 것이다.”
한미FTA가 통과되고 나면 제약산업 뿐만 아니라 국내 산업을 보호할 장치가 모두 사라지게 된다. 수도와 전기, 가스, 철도 등 네트워크 산업에 대한 정부 지원도 소송 대상이 된다. 한미FTA 협상단은 우체국 사업의 정부 독점을 5년 안에 없애겠다는 약속도 했다. 정 전 비서관은 “시골에 전기와 수도가 끊기거나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편지 한통 부치는데 몇천원씩 줘야 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날 포럼에서는 한미FTA 경제효과가 터무니없이 과장됐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신범철 경기대 경제학과 교수에 따르면 정부가 인용하고 있는 6% 추가 성장은 일반균형모형(CGE)을 두 번이나 돌려서 얻은 결과다. 당초 경제 효과가 0.4% 수준으로 국민 1인당 6만원 정도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나자 여기에 자본축적과 생산성 증대 효과를 감안해 다시 CGE 모델에 산입, 6% 성장과 1인당 120만원이라는 결과를 얻어냈다는 이야기다.
신 교수는 “한미FTA의 경제 효과가 6%라는데 이게 사실이고 이명박 정부의 성장 목표 7%를 감안, 실제로 10% 이상 성장이 가능하다면 농가 보조 같은 것도 필요 없다”고 분석했다. 정 전 비서관은 “정부가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한일FTA와 관련해서는 CGE 정태 모델만으로 경제효과를 산출한 것과 비교된다”고 지적했다.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만약 경제 효과 모형을 몇 차례 더 돌리면 100% 성장도 가능할 것”이라고 비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