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카치아피카스 미국 웬트워스대 정치학과 교수는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의 원동력을 ‘에로스효과’라는 말로 설명한 바 있다. 사회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그의 저서, ‘에로스와 문명’에서 ‘삶의 총체적 본능’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에로스’를 카치아피카스는 “해방을 향한 본능적 욕구”와 “억압에 저항하는 원초적 본능”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는 수백만의 일상적인 민중들이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직관적으로 믿으면서 갑자기 역사의 중심으로 나서게 된다.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들이 부정되고 동시에 보편적인 인류적 관심이 전면화된다. 이런 혁명은 의식적 요소나 혁명정당에 의해 의도되는 것은 아니고 인간의 본성과 자유를 향한 본능적 욕망이 집단적으로 승화되는 과정에서 가능하다.”
카치아피카스는 특히 ‘민중들의 직관적 동일시’와 ‘집단적 힘에 대한 믿음’에 주목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나 1971년 프랑스의 파리코뮌, 1980년 우리나라의 광주 민중항쟁, 그리고 1999년 미국 시애틀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시위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최근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의 넘치는 에너지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촛불집회에 나선 시민들은 경찰의 강제진압에 맞서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일관하면서도 승리에 대한 강한 집념과 확신을 드러낸다. 10대 여학생들이 기폭제가 됐던 촛불집회는 20대와 30, 40, 50대까지 가세하면서 반정부투쟁과 반신자유주의투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신분과 계급을 넘어 연대하고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라고 외치고 있다.
정성진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번 촛불집회는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됐지만 그 이면에는 IMF 이후 10년 이상 지속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뿌리깊은 불만이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촛불집회가 향후 조직적 좌파운동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가 관건이지만 반정부투쟁과 반신자유주의투쟁을 넘어 아래로부터의 대안세계화운동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를 드러냈다.
그러나 최근 집회에서는 마이크를 잡고 선두에 나섰던 다함께나 국민대책회의 등 단체에 비판이 쏟아졌고 일부에서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순수성을 왜곡시키지 말아달라”는 요구까지 나오기도 했다. 집회의 성격이 정치적으로 비화하거나 이념투쟁으로 확산되는데 부담을 느끼는 시민들도 상당수라는 이야기다. 윤성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촛불집회 참가자들 가운데는 보수계층도 많고 심지어 이명박 지지자도 상당수 섞여 있어 미국산 쇠고기 이외의 주제라면 구심점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주최 국제세미나에 참석차 방한한 데이비드 맥날리 캐나다 요크대학 교수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자유무역의 문제를 고민할 때 민족적 관점을 넘어 계급적 관점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의 저자인 맥날리 교수는 청계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한 소감을 이야기하면서 “시민들도 문제의 구조적인 본질이 단순히 미국산 쇠고기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맥날리 교수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필연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희생을 담보로 요구한다. 땅과 공장은 물론이고 물과 전기를 비롯한 기본적인 공공설비를 비롯해 삶의 모든 영역에 상품화와 화폐화를 무차별 확산시키고 그 과정에서 본원적 축적을 만들어 낸다. 맥날리 교수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항구적인 식민지배가 아니라 상시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자유무역협정”이라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란도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맥날리 교수는 한미FTA의 전망을 묻는 질문에 “캐나다의 경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싸우는 과정에서 미국이라는 거대한 수출 시장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민족적 관점에서 해법을 고민했고 타협적인 대안을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자본의 공격에 맞서 공공의 자산을 지켜내는데 실패했다”고 털어 놓았다. 민족적 관점을 벗어나 자본과 노동의 대립으로 이해하고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맥날리 교수는 한미FTA의 진짜 목표는 단순히 관세철폐나 규제완화가 아니라 자본을 위한 세계적 축적체제 구축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자본의 지배를 강화하고 자본의 이익을 위해 공공부문과 일자리, 삶의 질과 생활수준을 희생시켜 나가고 극단적으로는 기업이 국가를 상대로 제소할 수도 있는 체제개편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2000년 볼리비아 코차밤바에서 벌어진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우리에게 중요한 참고사례가 될 수 있다. 볼리비아의 경우도 당초 시작은 수돗물 사유화 반대투쟁이었지만 가스와 석유 등의 천연자원의 사유화 반대로 확산됐고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농부들과 청소년, 여성, 실업자, 자영업자 등이 합류하면서 사회 전반의 모든 영역에 걸쳐 반신자유주의투쟁을 촉발했다. 대통령을 두 번이나 끌어내린 뒤 당선된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과감한 좌파 개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맥날리 교수는 “초국적 자본의 세계화에 맞선 노동자 계급의 세계적 연대가 유일한 해답”이라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국경을 초월해 전통적인 농업지역을 붕괴시키고 이들을 비정규 임시직 임금 노동자로 내몰면서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캐나다나 볼리비아에서도 똑같이 벌어진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도 여전히 계급 정치의 개념은 유효하고 노동자 계급의 재조직과 정체성 확립이 더욱 절실하다는 이야기다. 맥날리 교수는 “노동자 계급이 저항의 주체로 서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아직까지 촛불집회 분위기로 볼 때 노동자 단체가 참여하고 의제설정에 개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일부 시민들은 이른바 운동권 단체들이 깃발을 드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다. 촛불집회가 반정부투쟁과 반신자유주의투쟁, 더 나아가 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아래로부터의 대안세계화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느냐는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전농 등이 집단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촛불집회와 화학적으로 결합하고 대중의 지지기반을 잃지 않으면서 장기적인 투쟁전략을 제시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