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9월의 일이었다. 독일이 갑자기 금리를 올리면서 영국에 들어와 있던 외국 자본들이 갑자기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자를 더 많이 주는 곳으로 옮겨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화의 가치가 치솟고 상대적으로 파운드화의 가치가 떨어진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그때 영국이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있었다는 것. 환율이 올라야 하는데 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이야기다.
영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독일처럼 금리를 끌어올려 외국 자본을 잡아두는 게 최선이겠지만 독일과 달리 영국은 가뜩이나 혹독한 불황을 겪고 있던 무렵이라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외환보유액도 넉넉하지 않았고 버티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실제 가치보다 고평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파운드화를 팔고 다른 통화로 갈아타면 무조건 이익을 보는 상황이었다.
당신이 헤지펀드의 펀드매니저라고 상상해보자. 파운드화를 계속 팔아 치우면 영국 정부의 외환보유액은 언젠가는 바닥이 나게 돼 있고 그 전에 환율을 올릴 수밖에 없다. 만약 지금 파운드화를 팔고 환율이 올라간 다음에 다시 사들이면 올라간 환율만큼 이익을 챙기게 된다. 너무나도 쉬운 게임 아닌가. 영국 정부가 버티지 못할 정도로 파운드화를 마구 팔아치우기만 하면 된다.
신용만 충분하다면 영국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파운드화를 팔고 마르크화나 다른 통화로 옮겨 타는 것도 가능하다. 나중에 환율이 오르면 다시 파운드화로 바꿔서 원금과 이자를 갚으면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길 수 있다. 환율을 지키느냐 무너뜨리느냐의 게임인 셈인데 당연히 지키기 보다는 무너뜨리기가 훨씬 쉽다. 정부가 낮은 환율을 유지하고 있고 환율이 가까운 미래에 뛰어오를 거라는 오를 거라는 확신이 있다면 이미 이긴 게임이나 마찬가지다.
그해 9월, 영국 정부는 결국 고정 환율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검은 수요일로 불리는 9월16일까지 파운드화 환율은 무려 20%나 치솟았다. 악명 높은 퀀텀펀드의 조지 소로스는 그 일주일 동안 무려 10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그때 영국은 조지 소로스를 비롯해 국제 투기자본의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검은 수요일 이후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천문학적인 시세차익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일단 영국 정부가 환율을 지키려고 쏟아 부은 외환보유액은 고스란히 투기자본의 계좌로 옮겨갔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환율이 치솟기는 금방이었지만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화폐 가치가 터무니없이 떨어졌고 영국 국민들의 고통도 계속됐다. 그 반대급부 역시 투기자본의 몫이었다.
(이상, 2007년 6월호 ‘인물과 사상’에 기고했던 “환율 조작으로 수출 기업 밀어주기 그만둬야 한다”에서 발췌 인용·수정.)
어딘가 기시감이 들지 않은가. 지난 일주일 우리나라 외환시장은 언뜻 검은 수요일을 앞둔 영국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여러 대외 여건을 보면 환율이 올라야 정상인데 이명박 정부는 외환보유액을 풀어 환율을 끌어내리고 있다. 지난 7일,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노골적으로 환율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25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이 그 실탄이다.
11일 원·달러 환율은 1002.3원으로 전일 대비 0.6원 하락했다. 이날 환율은 999.0원으로 시작해 한때 1004원을 넘어서기도 했지만 정부가 최소 2억달러 이상 매도 물량을 쌓아두면서 환율을 끌어내렸다. 정부가 환율 개입을 공식 천명했던 7일 이후 환율은 닷새만에 48.1원이나 떨어졌다. 과연 정부는 성공한 것일까.
일단 시장에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고 실제로 환율을 끌어내리기까지 했지만 1천원 언저리의 환율이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아직까지는 정부가 기선을 잡고 있어 환율 상승 압력이 둔화되는 추세라 투기세력의 공격이 눈에 띄지 않지만 상황이 돌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500억달러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지만 이처럼 “패를 다 보여주고 치는 포커 게임”에서는 결코 넉넉한 금액이 아니다.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언급을 꺼리면서도 환율이 오를 수밖에 없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유진투자선물 이경숙 연구원은 “장기적으로 보면 환율이 더 오를 거라고 보는 게 맞겠지만 정부가 워낙 강경하게 나오고 있어 한동안 제한적인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연구원은 그러나 “국제 유가 움직임이나 외국인 투자자들의 주식 매도, 세계적인 긴축정책 등을 감안하면 여전히 상승 압력이 큰 것도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박상현 CJ투자증권 연구원은 좀 더 회의적이었다. 박 연구원은 “정부의 환율정책이 돌아오기 힘든 선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자칫 정부의 의지와는 달리 원/달러 환율이 상승할 경우에는 정부의 외환시장 통제력은 상실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박 연구원은 “얼마의 희생(외환보유액 사용)이 따를지 모르겠지만 정부는 원화 강세에 올인할 수 밖에 없는 도박을 시작한 것”이고 “얼마나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며 그 성패는 향후 유가 추이에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유가의 하향 안정기조가 유지된다면 원화 강세와 맞물려 물가안정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지만 역으로 유가가 다시 사상 최고치 행진을 계속한다면 정부의 원화 강세 정책은 오히려 금융시장에 독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경상수지 적자 확대와 외국인 투자자들의 주식 매도도 걱정거리다. 아직까지는 투기세력의 움직임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약점이 발견되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