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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대책회의를 버리고 전대협을 따라나서다.

7월19일 시위 현장, 광우병 반대를 넘어 정권 퇴진 운동으로 변모.

퍼붓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치고 나자 광장에 시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기상청이 서울지역에 호우주의보를 해제한 것은 저녁 7시15분께였지만 비는 이미 오후 4시께부터 잦아들었다.


19일 촛불시위는 지난 두 달여의 시위와 달리 질서정연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이날도 경찰은 시청 앞 광장을 원천 봉쇄했고 시민들은 오후 5시께부터 청계광장에 모여들었다.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정부의 노동정책을 비판하는 자유발언이 광장 한 구석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오후 6시30분께부터는 광장 반대편에서 주경복 서울시 교육감 후보의 유세가 열렸다.

주 후보의 유세가 끝난 시간은 저녁 7시20분께. 광우병 대책회의 관계자는 “오늘 비가 많이 올줄 알고 많은 것을 준비하지 못했다”면서 “간단히 집회를 끝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은 집회가 시작하자마자 대책회의를 뒤로 하고 전대협 깃발을 따라나서기 시작했다. 전대협 깃발을 든 사람들은 과거 1980년대 후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주축이 된 이른바 ‘전대협을 사랑하는 사람들’ 소속 회원들이다.

앞에서 대열을 이끌었던 김세랑(37세)씨는 “전대협이라는 깃발 아래 모이기는 했지만 따로 무슨 모임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누가 깃발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두 달 넘게 날마다 시위를 하다 보니 오다가다 얼굴 알게 된 사람들끼리 모이게 됐다”는 이야기다. 김씨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운동 안했던 사람들이 어디 있겠느냐”면서 “서로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뜻이 통해서 모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오후 5시께부터 청계광장에 모여 대열을 정비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과 “전대협 진군가”, “동지가”, “농민가” 등을 부르면서 자칫 관성화하기 쉬운 촛불시위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 일으켰다. 이날 시위 참가인원은 집회측 추산 5000여 명, 지난 주말보다 훨씬 적은 인원이었지만 열기는 오히려 더 뜨거웠다. 대책회의를 남겨두고 출발한 행진 대열은 종각 앞을 지나 종로3가를 거쳐 을지로 3가 쪽으로 빠졌다가 다시 인사동 입구 쪽으로 돌아왔다.

이날 거리행진의 특징이라면 우선 촛불을 든 시민들이 눈에 띄게 줄어 들었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행진하는 내내 일관되게 “타도 이명박”과 “해체 한나라”를 외쳤다. 이날 시위의 달라진 분위기는 촛불시위가 미국산 쇠고기 반대를 넘어 정권 퇴진운동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또한 전대협의 등장은 그동안 오합지졸처럼 흩어지곤 했던 시위 행렬이 자체적으로 조직화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요 집행부 간부들이 모두 구속됐거나 경찰 수사망을 피해 도피중인 탓도 있지만 대책회의의 조직력이 크게 약화됐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시위의 주요 구성원들은 여전히 20대 대학생들과 네티즌들, 일반 시민들이다. 다음 아고라를 비롯해 마이클럽이나 디시인사이드 등의 인터넷 동호회의 깃발도 여럿 눈에 띄었다. 마이클럽 회원들은 시민들에게 헬멧을 나눠주기도 했다.

이날 시위대는 질서정연하게 전대협 깃발을 따랐고 행진을 진두지휘했던 전대협 동우회 회원들은 “속보”, “정지”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의 후미가 뒤처지지 않도록 대열을 정비했다. 이날도 경찰은 곳곳에서 시위대를 막아섰고 전대협 회원들은 휴대전화로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시위대를 안전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시위대는 저녁 8시께부터 인사동 4거리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다가 저녁 9시30분 현재 다시 종각을 지나 수출입보험공사 앞에서 경찰과 대치중이다. 경찰은 시위대의 해산을 요구하며 물대포를 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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