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5일 광복절을 앞두고 대규모 사면을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보수·경제지들이 기업인 사면이 필요하다며 바람잡기에 나섰다.


한국경제는 일찌감치 4일 “경제인 사면 최대한 폭넓게 실시해야”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보냈다. 이 신문은 아예 노골적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제를 살리고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 급선무”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 기업의욕의 고취”라고 선언한다.

기업의욕이 없어서 경제가 어렵고 고용이 안 늘어났다는 진단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기업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기업인들의 범죄 마저도 눈감아줘야 하나. 가뜩이나 솜방망이 처벌로 사법 정의가 땅에 떨어졌다는 비난을 받는 상황이다.

한국경제는 이 사설에서 “과거의 잘못된 관행과 여건 때문에 분식회계나 배임 등의 혐의로 법의 심판을 받은 기업인들이 경제활동을 제약당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면서 “그런 족쇄를 풀어주는 것은 이 시점에서 가장 실효성 있는 경제 살리기 처방”이라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분식회계나 배임 등이 이들 기업인들의 잘못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된 관행과 여건”일 뿐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펼친다. 경제를 살린다는 이유로 이들의 범죄에 유난히 관대한 이중 잣대가 이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뿌리뽑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이 신문은 지적하지 않는다.

이 신문은 사흘 뒤인 7일에도 거의 비슷한 내용의 사설을 또 싣는다. “경제계가 큰 기대를 거는 8·15 대사면”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 신문은 “어찌보면 기업인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라면서 “앞으로 더욱 투명한 경영과 기업 성과를 제고하는데 힘쓰도록 특별사면과 복권을 광범위하게 실시하는 것이 국가 발전에 더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목할 부분은 이 신문의 최대 주주가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원사들이라는 사실이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비롯해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이 이번 특별사면에 포함되느냐가 이 신문으로서는 최대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경우는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정부가 폭넓은 특별사면에 대한 확고한 방침을 신속히 결정하도록 거듭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대목에서는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겠다는 의도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 신문은 11일 취재여록이라는 칼럼에서 노골적으로 정몽구 회장의 사면을 요구한다. 이 신문은 일본의 도요타자동차가 브라질에 새 공장을 설립한 것과 관련, “정 회장이 집행유예 기간이라 출국과 비자발급, 해외 입국수속 등에 이런 저런 불이익을 받고 있어 해외 경영이 쉽지 않다”는 현대차 관계자의 말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집행유예라고 해서 해외 출국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비자 발급은 성범죄나 미성년 관련 범죄만 아니라면 집행유예와는 무관하다. 출국에 앞서 법무부의 허가가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출국이나 입국이 아예 금지되지는 않는다. 다만 불편할 뿐인데 이 신문은 ‘회장님’의 불편함을 덜어드리기 위해 이처럼 고분분투하고 있는 셈이다.

출입국관리법 4조는 범죄의 수사를 위하여 그 출국이 부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 형사재판에 계속중인 자, 징역형 또는 금고형의 집행이 종료되지 아니한 자, 법무부령이 정하는 금액 이상의 벌금 또는 추징금을 납부하지 아니한 자에 대해 출국을 금지하고 있다. 집행유예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문화일보도 5일 칼럼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질타와 비난이 아니라 용서와 격려”라며 “세계 경제전쟁의 최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 기업들을 향한 국민들의 따뜻한 격려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일보도 8일 사설에서 “그들이 앞장서서 투자를 늘리고 해외시장을 개척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거들고 나섰다. 서울경제도 11일 사설에서 “사면은 경제인의 기를 높여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이들 신문이 말하는 경제인은 사실 재벌 대기업 총수들이다. 이들 신문은 재벌 총수들을 용서해주는 것이 경제를 살리는 것이라는 이상한 도식을 정부와 국민들에게 강요한다. 이들 신문은 재벌 총수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시선을 보내주자고 제안하지만 한번도 그 따뜻한 시선을 경제 일선의 노동자들에게 보낸 적은 없다.

경제개혁연대는 10일 성명을 내고 “과거 김영삼 대통령이 모두 9차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도 임기 중 각각 8차례나 사면을 실시했고 그때마다 경제 살리기라는 똑같은 이유로 경제인에 대한 사면도 대부분 포함됐지만 과연 이로 인해 경제가 살아났는지 지극히 의문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는 “국경일마다 되풀이된 사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업인의 범죄는 근절되지 않았으며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국민들의 사법불신만 심화됐다”고 덧붙였다. 경제개혁연대는 또 “더 이상 경제 살리기라는 미명하에 법과 원칙을 훼손하는 사면으로 경제질서를 훼손하는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11일 김경한 법무부 장관 주재로 사면심사위원회를 열어 사면·복권 대상자 명단을 확정한데 이어 12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대상자를 확정해 발표할 계획이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정부가 이들 보수·경제지들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재벌 총수들, 왼쪽부터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등 이들은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법무부는 12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사면복권 대상자를 확정해 발표할 계획이다. 이 전 회장은 아직 형 집행 전이기 때문에 이번 사면복권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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