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은행의 해외 차입에 지급 보증을 서기로 했다. 세계적으로 금융 불안이 확산되면서 달러 가뭄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당장 정부가 보증을 서주기만 해도 외채 상환 연장 등에 숨통이 트이게 된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엉뚱한 데서 생색을 냈다. “국민들 세금으로 혜택 받는 은행들이 고임금 구조를 유지한 채 정부 지원을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21일 청와대 국무회의 자리에서다.
이 대통령은 “옛날처럼 받을 임금 다 받고 문제가 생기면 정부 지원을 받는 것이 되풀이 돼서는 안 된다”면서 “은행의 자구적 대응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의 천박한 노동관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언론이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모습은 안쓰러움을 넘어 한심하고 참담할 정도다. 22일 상당수 언론이 이 대통령의 이날 발언을 비중있게 전달하면서 비판은커녕 대통령의 발언을 거들어 은행에 임금 삭감을 주문하고 있다.
일단 이번 지급 보증은 일시적인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말 그대로 외화 차입에 보증을 서는 것뿐이다. 일부 언론이 과장된 보도를 내보내긴 했지만 당장 혈세가 빠져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은행들이 상환을 하지 못할 경우 정부가 이를 물어줘야 하고 막대한 혈세를 쏟아 붓게 되겠지만 은행이 망하거나 세계 경제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 국면으로 치닫지 않는 이상 그럴 가능성은 낮다.
물론 당장 혈세가 들어가는 건 아니라고 해도 특혜는 특혜고 자칫 도덕적 해이를 방치 또는 조장할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장이 삐걱 거릴 때마다 기업들의 경영 실패를 정부가 해결해 줄 수는 없는데 자칫 툭하면 너도 나도 정부에 손을 벌리게 될 빌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짚고 넘어갈 부분은 과연 이런 도덕적 해이의 주체가 누구냐다. 은행의 경영진인가. 아니면 은행의 주주들인가. 아니면 은행의 노동자들인가.
도덕적 해이의 주체는 극단적인 탐욕으로 세계 경제를 수렁에 빠뜨린 월스트리트 금융 자본가들이다. 이들과 이해를 같이 하는 우리나라 금융 투자자들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나서서 부실 채권을 사들이고 은행들에 지급보증을 하고 외환보유액을 풀고 세금을 깎아줘 가면서 주가를 끌어올리고 온갖 대책을 쏟아내 이 고장 난 시스템을 다시 굴러가게 만드는데 성공한다면 이들의 부실은 결국 국민들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좀 더 정확히 구분을 짓는다면 정부가 나서서 자본가들의 실패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셈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덕분에 이 거대한 착취 시스템은 이제 지구적인 규모로 가동되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노동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비난하고 임금이 많다고 비난하는 것은 엉뚱하기도 할뿐더러 도대체 최소한의 논리적 설득력도 없다. 지금의 위기가 은행 노동자들이 임금을 많이 받아서 촉발된 것인가.
만약 이 대통령이 은행의 도덕적 해이를 경고할 생각이었다면 자산 건전성을 확보할 것을 주문하고 금융 규제를 강화할 것을 검토했어야 한다.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의 교훈을 일깨워 극단적인 자유방임 시장 원리를 넘어 시장의 실패를 보완할 수 있는 사회적 통제 시스템을 고민했어야 한다. 정부 지원을 받았으니 임금을 깎으라고 말할 게 아니라 정부 지원을 받았으니 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하라고 강조했어야 한다.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한들, 설령 정부가 은행에 지급 보증을 섰다고 한들, 노사 자율로 결정할 임금 문제를 간섭하고 나선 것은 매우 부당하고 주제넘은 일이다. 임금을 많이 받는 것이 온당치 못한가. 우리는 누구나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원하고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더 잘 사는 나라를 원한다. 그게 대통령이 할 일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나서서 임금이 많다고 타박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고 꼴 사나운 일이다.
더 한심한 것은 언론 보도 태도다. 중앙일보는 “월급 많이 받아가면서 또 손 벌리나”라는 선정적인 제목을 내걸었다. 이 신문은 “정부 지원을 받게 된 만큼 뭔가 ‘피 흘리는 모습’을 보이라는 압박이 은행에 가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매일경제는 “환란 아픔 잊었나… 은행 모럴 해저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고임금을 향유하는 은행들이 위기상황이라고 정부 지원을 받는 관례가 되풀이 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매일경제와 경향신문, 서울신문 등은 주요 은행들 평균 임금을 비교한 표를 게재하면서 이 대통령의 발언을 거들었다. 한겨레 역시 “은행들 눈총 피하기 대책 부산”이라는 기사에서 “외환위기 뒤 공적자금을 받아 연명한 은행권 임직원들이 고액의 급여를 받고 있다는 따가운 눈길을 받고 있어 시늉으로라도 자구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는 처지”라고 지적하는 등 별다를 게 없는 논조를 펼쳤다.
이들의 임금을 깎으면 그 돈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세금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고객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익이 늘어나겠지만 그리 큰 규모는 아니고 주가가 조금이나마 오를 것이고 주주들 배당도 조금이나마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임직원들 임금을 깎는 것이 정부 지원을 받는 은행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일일까.
문제는 저런 기사들이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다른 노동자들과 구직자, 실업자들에게는 실제로 먹힐 것이며, 노동자들 간의 질시와 분열을 조장한다는 점이겠지요…
과거의 외환위기 당시 IMF가 요구했던 것들이 오히려 정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정부나 세계 각국에서 내놓는 처방책은 단기적이고… 결국에는 더 큰 부실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