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위기.

지금 우리는 10년 전으로 시계 바늘을 돌린 듯 묘한 기시감을 경험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없다고 큰 소리 치던 정부가 이제는 호떡집에 불이라도 난 듯 온갖 임기응변식 대책을 서둘러 쏟아내고 있다. 금융회사들은 당장 제 코가 석자라 대출을 거둬들이고 있고 당연히 시중에는 돈줄이 바짝 말랐다. 기업들은 환율 상승에 따른 원자재 가격 급등과 세계적인 수요 감소, 유동성 부족의 삼중고에 허덕이고 있다.


금융시장에서는 벌써부터 부도 위기에 직면한 기업들 리스트가 떠돌고 상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시나리오도 거론된다. 자칫 부실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것을 우려해 다들 쉬쉬하면서도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개입에 기대를 걸고 있는 분위기다. 우리는 길고 어두운 불황의 터널에 이제 막 들어선 참이다. 감정적인 선전 선동이나 실체 없는 호들갑을 넘어 명확한 위기 진단과 이에 따른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시점이다.

10년 전 위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

먼저 10년 전 위기와 최근의 위기는 외환 유동성 위기라는 점에서 닮았다. 정확히 11년 전 이 무렵 우리나라가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지경에 이른 것은 은행들이 단기 외채를 마구잡이로 끌어다 쓴데서 비롯했다. 태국에서 금융 위기가 촉발되자 우리나라 은행들은 곧바로 채무 불이행 상태에 돌입했다. 원화는 넘쳐나지만 정작 이를 바꿀 달러화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환보유액은 곧바로 바닥을 드러냈다.

지금 겪고 있는 위기도 본질은 비슷하지만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미국이 서브 프라임 사태로 휘청거리자 안전 자산으로 돈이 옮겨갔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신흥 시장에서 먼저 발을 빼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특히 가계 부채 비율이 높고 부동산 관련 대출이 많은데다 수출 의존도가 커서 위기에 취약한 구조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외환보유액은 넉넉한 상태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탈에 맞서 환율 급등과 유동성 위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년 전 우리나라는 IMF 구제금융을 끌어오는 대신 혹독한 구조조정을 주도적으로 받아들였다. 부채비율이 높아 대출 연장에 실패한 기업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고 금융회사들은 정부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살아남거나 서로 통폐합되거나 잇따라 외국 자본에 팔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규모의 공적 자금이 투입됐고 이는 고스란히 국민들 부담으로 돌아왔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개혁은 철저하게 노동자와 서민들의 희생을 딛고 이뤄졌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10년의 변화는 사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의 본질이기도 하다. 기업들 부채비율은 눈에 띄게 낮아졌고 실적은 크게 개선됐으며 금융회사들 재무 건전성 지표도 개선됐고 경상수지는 당연히 10년째 흑자를 계속하고 있고 외환보유액은 한때 2500억달러를 넘기도 했다. 외국인 투자자들 비중도 크게 늘어 한때 투자 부적격 등급을 받았던 나라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그러나 부채비율이 낮아진 만큼 기업들 이익이 늘어나고 주가도 뛰어올랐지만 설비투자가 줄어들면서 경제 전반적으로 성장 동력이 크게 위축됐다. 금융회사들은 골치 아픈 기업 대출보다는 가계 대출에 치중했고 그 대부분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가 거품을 만들었다. 노동 유연화가 확대되면서 노동의 질이 크게 떨어졌고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부쩍 늘어났고 그만큼 양극화도 심해졌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위기의 본질은 비슷하다.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의 도입과 주주 자본주의의 확대도 지난 10년 동안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기업들은 주주 이익의 극대화라는 명분 아래 단기 실적에 치중하면서 자사주를 사들이거나 배당을 늘려 주가를 끌어올리는데 골몰해 왔다. 성장의 성과들은 고스란히 주식시장으로 흘러들어갔고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몫이었다. 우리는 지금 그 불균형 성장의 한계를 고통스럽게 깨닫고 있는 중이다.

2008년 겨울,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단순한 유동성 위기 그 이상이다. 우리나라는 올해 12년 만에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수출과 수입이 동시에 줄어들고 있는데 수출 둔화가 훨씬 큰 탓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탈이 계속되면서 10월 말 기준 자본수지 적자는 이미 사상 최대 규모를 넘어선 상태다. 신용 경색이 확대되고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되면 기업과 가계의 연쇄 부도와 파산으로 이어지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해야 한다.

적당히 고치기만 하면 계속 굴러갈 수 있을까.

10년 전 위기가 동아시아 지역에 국한된 금융위기였다면 지금 겪고 있는 위기는 세계적인 신용경색과 실물 경제의 위기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현실을 직시하려면 미국 금융자본주의가 구조적인 위기를 맞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거품에 의존한 기형적인 성장 모델이 한계를 맞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과잉 유동성이 해소되는 과정인데 그 과정에서 충격과 혼란은 불가피하다.

반면, 무사태평한 낙관론자들이 찾는 희망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일단 미국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리 없다는 막연한 기대, 미국을 비롯해 세계 모든 나라 정부들이 대규모 유동성 공급에 나서고 있어 당장 부실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믿음, 여전히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고 다만 비이성적인 공포 심리가 환율 급등과 주가 하락의 원인이라는 자기 합리화 등이 문제의 본질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다.

사상 초유의 위기를 맞는 정부의 대책은 그야말로 주먹구구식이다. 외환보유액을 풀어 환율을 인위적으로 끌어내리거나 유가 환급금이라는 명목으로 국민들에게 용돈 수준의 현금을 나눠주거나 건설사들 연쇄 부도를 막기 위해 부동산 규제를 풀고 은행들에 채권 매입 등 유동성 지원을 약속하고 미국 정부에 손을 벌려 달러화를 일부 확보하는 정도다.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법은 될 수 없는 지극히 단편적인 처방이다.

지난 10년 미국의 성장을 주도해 왔던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는 터무니없는 거품으로 확인됐다. CDO(부채담보부증권)니 CDS(크레딧 디폴트 스왑)니 실체가 불분명한 파생금융상품에 신용평가회사들은 높은 등급을 부여했고 금융회사들은 이를 사고팔면서 가공의 이익을 만들어냈다. 미국 국민들은 흥청망청 빚을 끌어다 쓰고 이를 다른 나라에 떠넘기면서도 눈앞에 다가온 몰락을 예견하지 못했다.

고민해야 할 문제는 이미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과 성장의 한계가 드러난 상황인데 과연 낙관론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적당히 부실을 덮고 유동성을 공급해 투기적 수요를 다시 끌어내는 것만으로 이 시스템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굴러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부실 건설사들 몇 개, 자동차 회사들 몇 개, 금융회사들 몇 개 문을 닫고 나면 해결되는 문제일까.

미국 정부는 부실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이미 7조달러 이상의 공적자금을 쏟아부은 바 있는데 미국 정부가 이처럼 마구잡이로 달러화를 찍어내면 달러화의 가치가 떨어져야 맞다. 그런데 실제로는 세계적으로 금융회사들이 유일한 안전자산인 달러화 확보에 매달리면서 달러화 가치가 오히려 치솟고 있다. 이 말은 곧 다른 나라의 통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말이고 미국의 부실이 고스란히 다른 나라들로 전가된다는 의미다.

사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달러화 패권주의의 혜택을 많이 봤다. 우리나라는 IMF 직후 높은 환율을 이용해, 달리 말하면 낮은 원화 가치를 이용해 수출을 늘리고 달러화 자산을 대량 확보했다. 그런데 문제는 영원할 것 같았던 팍스 아메리카나가 무너지고 달러화 가치가 도전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미국과 공동 운명체가 됐고 달러화 가치가 추락하면 동반 몰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근 확산되고 있는 신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브레튼우즈 체제란 순금 1온스를 35달러로 교환해주기로 한 이른바 달러 본위 제도를 말한다. 1944년에 도입된 이 제도는 미국이 1971년 금 태환을 중단하면서, 다시 말해 35달러를 줘도 금 1온스를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유명무실하게 됐다. 달러화 가치가 고무줄처럼 늘어나거나 줄어들게 됐다는 이야기다.

미국이 달러화를 마구 찍어내면 달러화의 가치가 줄어들고 달러화에 연동된 다른 나라들 통화의 가치도 덩달아 줄어들게 된다. 미국 경제에 세계 모든 나라들이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이 최대의 수출 시장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 달러화가 곧 세계 경제의 가치 척도인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불평등한 관계는 미국이 세계 최대의 군사 대국이라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신 브레튼우즈 체제는 달러화의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박탈하는데서 출발한다. 미국의 무책임한 달러화 가치 희석과 부실의 확산을 차단해야 한다는 게 기본 전제다. 그러려면 유로화나 아시아 공동 통화 등 달러화의 대안을 폭넓게 고민해야 하고 미국이 달러화를 무제한 찍어낼 수 없게 되면 이미 자본잠식 상태에 놓인 미국 수출 중심의 성장전략도 전면 재고돼야 한다. 미국 금융자본주의의 떡고물을 기대하기 어려워질 거라는 이야기다.

다른 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 너머를 고민해야 할 때.

최근 출간된 나심 탈레브의 ‘검은 백조’라는 책에는 수백년 동안 세상의 모든 백조는 당연히 흰색이라고 생각해 왔던 유럽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처음 검은 백조를 발견했을 때 그 충격을 생각해 보라. 이 검은 백조는 한 마리의 돌연변이일까, 아니면 세상에는 수많은 검은 백조가 있는데 단지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을 뿐일까. 최근 경제 위기도 검은 백조처럼 우리에게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10년 전 겪었던 위기가 금융시장 개방에 따른 일시적 충격이었다면 지금 겪고 있는 위기는 개방화된 세계 시장이 겪는 구조적인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검은 백조는 단순히 한 마리의 돌연변이일 수도 있지만 앞으로 우리가 발견하게 될 수없이 많은 검은 백조 가운데 한 마리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전혀 다른 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 그 이후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만약 어떤 식으로든 미국 금융자본주의의 몰락이 불가피하다면 미국에 기생해 왔던 우리 경제 시스템도 원점에서 다시 검토돼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대안을 고민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거대 미국과 정면 대응도 불사해야 한다. 주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에 대한 본질적인 반성과 대안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위기는 계속 반복되고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슈투데이 청탁으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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