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이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은행들이 대출을 축소하고 현금 확보에 매달리면서 부실이 확산되고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최근 논란의 핵심은 은행들 BIS 비율이 어느 정도가 적정한가다. BIS 비율이란 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말한다. 은행이 위험자산 대비 자기자본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느냐를 나타내는 지표다. BIS 비율을 높이는 최선의 해법은 무엇일까.
1988년 제정된 바젤I 기준은 신용 위험을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은행의 위험 관리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적 규제라는 비판이 제기돼 바젤II 기준, 이른바 신BIS협약이 체결된다. 바젤I이 모든 차입기업에 일률적으로 100%의 위험 가중치를 적용하는 반면, 바젤II는 신용등급에 따라 위험 가중치를 차등 적용한다. 보유채권의 신용등급이 낮아지면 위험 가중자산이 늘어나 BIS 비율이 낮아지게 된다.
자기자본은 기본자본과 보완자본으로 나뉘는데 기본자본은 자본금과 이익잉여금, 미교부 배당금을 합친 것이다. 보완자본은 부채의 성격으로 기본자본은 아니지만 자기자본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인정되는 항목이다. 흔히 자기자본비율은 10% 이상, 기본자본비율은 8% 이상이면 우량은행으로 평가된다. 최근 은행들이 앞 다퉈 후순위채 발행에 나서는 것도 자본확충을 통해 BIS 비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후순위채는 자기자본은 아니지만 만기 5년 이상으로 발행될 경우 보완자본으로 인정돼 BIS 비율이 올라가게 된다. 시중은행들은 연말까지 BIS 비율을 11% 이상, 기본자본비율을 8% 이상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9월 말 기준 국내 은행권 기본자본비율은 8.28%에 지나지 않는다. 18개 은행 가운데 기본자본비율이 8%에 미치지 않는 곳이 12개나 된다.
BIS 비율이 문제되는 건 경제 위기가 확산되면서 가계와 기업 부실이 현실화 될 경우 BIS 비율이 더 낮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총여신대비 부실채권 비중이 2003년 카드사태 때 2.7% 수준으로 올라가면 BIS 비율이 9% 후반으로 낮아지고 추가 손실이 7조원이 넘게 된다는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부실채권 비중이 5%가 되면 추가 손실은 18조원으로 불어나게 된다.
문제는 가뜩이나 시중 자금이 말라붙어 있는 상황에서 은행들이 발등의 불을 끄는데 급급하게 되면 시중 유동성이 더 위축된다는데 있다. 게다가 조달 비용이 높은 후순위채는 만기가 되면 갚아야 할 부채다.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지만 근본적인 처방은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마저도 추가 발행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이른바 “돈맥 경화”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삼성증권 분석에 따르면 현재 은행들은 10조원 이상 후순위채를 추가로 발행할 수 있으며 최대한도로 발행할 경우 BIS 비율을 1.4% 포인트 개선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금리 8%를 가정할 경우 연간 8470억원의 이자비용이 발생할 전망이다. 일부 은행들이 지주회사가 채권을 발행해 증자에 참여하는 방법으로 BIS 비율을 높이고 있지만 역시 7.4조원을 확충할 경우 이자 비용이 5920원에 이를 전망이다.
최근 언론의 관련 보도는 은행의 건전성 지표가 위험하다는 경고에 그칠 뿐 정작 아무런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자본확충에 나서 자산건전성을 개선하라는 공허한 요구에 그치거나 정부와 한국은행에 유동성 지원을 요구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BIS 비율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면서 경기 회복의 발목이 잡힌 상황이다. 정부가 국민연금 등을 동원해 후순위채를 매입하는 등 유동성 지원에 나섰지만 여전히 자금이 돌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경향신문은 12일 18면 “금융당국 엇박자 주문 논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금융당국의 이중잣대를 문제삼고 있다. 금융당국이 BIS 비율을 높일 것을 요구하면서 자금난이 가중되고 있는데 대출과 자본확충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이 신문은 민간 경제연구소 관계자의 말을 인용, “정부가 후순위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을 통해 은행들의 자본확충에 도움을 줘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매일경제도 12일 6면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하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당국이 두가지 과제를 모두 달성하라고 종용하는 것은 은행권에 혼란을 가중시킨다”며 정부 정책을 문제삼았다. 이 신문 역시 “은행들은 자체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하이브리드 채권 발행 한도를 올려주고 자본확충펀드를 통해 인수해줄 것을 건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 지침에 호응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주주 권익을 외면할 수도 없어 고민”이라는 한 은행장의 말도 주목된다.
BIS 비율을 높이려면 분자인 자기자본을 늘리거나 분모인 위험자산을 줄이면 된다. 분모를 늘리려면 보통주 유상증자를 하거나 우선주를 발행하면 되고 분자를 줄이려면 대출채권을 기초로 유동화증권을 발행해 위험자산을 털어내면 된다. 주목할 부분은 은행들이 주주들의 이익 훼손을 우려해 보통주 증자를 꺼리고 있으며 정부 간섭을 우려해 공적자금 투입 역시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투자증권 박소연 연구원은 “은행의 위기는 궁극적으로 후순위채 발행이 아니라 증자를 통해서만 타개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후순위채의 경우 이자 부담이 만만치 않은데다 잔존 만기가 5년 이내인 경우 1년이 지날 때마다 발행 금액의 20%를 보완자본에서 제외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추가 자본조달이 필요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상환 우선주 역시 BIS 비율과는 관계가 없고 한은 지급준비율 인하 역시 미봉책이다.
박 연구원은 “결과적으로 자기자본을 확충하는 것이 근본적인 치유책이며 증자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최근 주요 금융지주회사를 통해 회사채를 발행해 자회사 은행의 증자에 참여하는 것도 박 연구원은 본질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당장 BIS 비율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결 재무제표 기준으로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박 연구원은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보통주 증자가 유일한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기존 주주들의 반발이다. 요즘처럼 주가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 증자를 하게 되면 가격을 높게 받을 수 없는데다 주주 가치가 희석돼 주가가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위험 부담을 줄이는 것이 오히려 주주 가치 제고에 긍정적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IBK투자증권은 이번 위기로 대출자산의 5% 정도가 부실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삼성증권 김재우 연구원은 “일부 은행들은 여전히 추가 자본확충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주주가치가 훼손되는 방식은 피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주주 가치가 희석되지 않으면서도 기본자본비율을 높일 수 있는 만기 30년 이상 상환우선주 발행 등이 가능한 대안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연구원은 “다만 인수 주체를 찾기 어렵고 금리가 높다는 점이 우려사항”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