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단기해법은 없다… 급할수록 본질에 집중하라.”
한국인이면서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경제 전문가는 아마도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가 유일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는 이런 배경도 한몫을 할 것이다. 장 교수가 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지난해 국방부 선정 불온도서에 꼽히기도 했는데 조선일보는 여전히 그의 인터뷰를 비중 있게 싣는다. 그의 주장에는 핵심을 관통하는 직관적인 통찰력이 담겨있다.
장 교수는 보호무역과 정부 보조금으로 성장한 선진국들이 후진국들에게 시장개방과 자유무역,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것은 모순일 뿐만 아니라 위선이고 사기라고 주장해 왔다. 장 교수는 또 주주자본주의와 금융 세계화의 확산에 맞서 정부와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조해 왔다. 그는 특히 금융규제 강화와 정부 주도의 연구개발 투자, 복지 확대, 사회안전망 확충 등을 대안으로 제안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세계은행이 공동주최한 개발경제컨퍼런스에 참석하러 잠깐 귀국한 장 교수를 23일 저녁 신라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시차에 적응이 안 돼 피곤하다던 그는 질문을 던지자 이내 열변을 토해냈다.
– 언론에서는 당신에게 늘 경기 전망만 묻는다. 위기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 같은가. 내년 경기는 어떨 것 같은가 등등. 오늘은 좀 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나라 경제가 회복 속도가 가장 빠르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사실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대외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우리나라 경제는 세계 경제와 함께 갈 수밖에 없고 빠질 때 가장 많이 빠지고 오를 때 가장 많이 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나라만 회복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착시현상이다. 이걸 직시해야 한다.”
– 주식시장의 자금공급 기능이 퇴색하고 은행들은 손쉬운 부동산 대출에만 매달리고 있다. 기업들이 현금 유보율을 늘리면서 설비투자도 줄어들고 경제의 역동성도 줄어들고 있다. 정부가 막대한 재정지출로 경기를 끌어올리고 있지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위기는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시스템을 뜯어 고치지 않으면 사실 답이 없다. 외환위기 이전과 비교하면 우리나라 은행들 기업대출 비중이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규제가 풀리면서 은행들 입장에서는 이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기업 대출에 나서지 않아도 쉬운 돈벌이 수단이 널렸다. 기업들도 굳이 무리하게 신규 사업을 벌이기 보다는 현금을 쌓아두고 이익을 늘리는데 골몰하고 있다. 주식시장도 마찬가지다. 주식시장이 자본조달 창구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기업의 자금이 배당이니 자사주 매입이니 주식시장으로 빠져나가기만 한다.”
–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 선진국들은 더욱 심각한 것 아닌가. 주주 자본주의가 문제란 건 누구나 알지만 세계는 주주 자본주의가 더 강화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주식시장이 자금공급이 아니라 자금유출 창구가 된 것은 1980년대부터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심하다. 주주들에게 좋은 것이 기업에게 좋다는 믿음이 확산되면서 경영진이 주주들과 결탁하기 시작했다. 주주들의 이해와 경영진의 이해가 일치하는 지점이 바로 스톡옵션이다. 임금을 동결하거나 노동자들을 자르고 비정규직으로 내몰고 설비투자를 미루면서 이익을 늘리고 그걸 주주들과 경영진이 나눠 갖는다. 단기 실적을 노리고 장기적인 성장성을 희생하는 일도 벌어진다. 그게 주주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가능한가.
“글쎄, 하루 아침에 바뀌지는 없겠지만 지금 시스템이 한계가 있다는 건 누구나 알게 됐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쏟아 부으면서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당히 이대로 가다보면 다시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크게 반성하는 것 같지도 않고 딱히 큰 변화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배우고 고쳐가는 것 아니겠나.”
– 시니컬하게 들린다. 이번 위기를 겪고 나서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말인가. 한동안 위기가 계속 반복될 거라고 보나.
“그건 지켜봐야 안다. 가던 대로 가자는 사람들이 있고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나. 그걸 지금 예단하는 건 의미가 없다.”
– 과감한 재정지출로 급격한 경기침체는 막았는데 이제 그 후유증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다음 단계로는 뭐가 필요할까.
“얼마나 빨리 새로운 시스템을 조직하느냐의 문제일 텐데 적당히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는 세력들이 문제다. 그러나 과연 그게 뜻대로 될까. 일단은 재정적자를 메워야 할 텐데 국민들 저항도 만만치 않을 거고 경기지표도 반짝 반등한 것 같지만 다시 떨어지는 게 많다. 미국의 경우 실업률이 여전히 늘고 있고 신용카드 연체율도 우려스럽다. 지난해 가을 실업한 사람들은 이제 곧 실업 급여가 끊긴다. 그럼 다시 연체가 늘고 부실이 확산되고 위기가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
– 금융의 사회적 책임을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미국에서는 극단적으로 은행 국유화까지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자금 지원만 하고 정작 경영 실패의 책임은 묻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에는 기업 구조조정에 정부가 개입했다는 의혹까지 나오고 있다. 원칙이 없다는 이야기다. 진보진영에서는 관치금융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은행을 마냥 시장에 맡겨둘 수도 없는 일이지만 정부가 개입하는데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관치금융의 실패한 경험 때문인데 관치금융을 제대로 못해서 문제지 관치금융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대통령이 정당한 절차를 밟아서 선출됐다면 그 권력이 정당하다면 관치금융을 하는 게 맞다. 다만 정부의 역할이 워낙 광범위하니까 모든 국민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정부가 규제하고 개입하는 게 맞다.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은 정부가 개입하고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게 맞다. 무조건 관치라면 나쁜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래서 민주주의가 필요한 거다.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무기가 민주주의 아닌가.”
– 가난한 사람들이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아파트 가격을 올려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대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상당부분 화석화된데다 민의는 대변되고 있지 않다. 들으려고도 않는다. 권력이 이미 시장에 넘어갔다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 맞는 것 같지 않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나. 대의제 민주주의를 내버려두고 뭘로 사회를 바꿀 건가. 민주주의는 사회를 바꾸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차가 여러 대 있는데 큰 트럭으로 날라야 가장 많이 나를 거 아닌가. 트럭이 고장 나면 고쳐야 한다. 고장 났다고 버려둘 건가. 단순히 정권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을 무시할 수 없게, 국민들을 두려워하게 만들어야 한다.”
–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고 노동자들은 더욱 열악한 조건으로 내몰리고 있다. 정부는 성장을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고 한다. 기업들은 경영실패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실제로 쌍용자동차 같은 경우만 해도 회사가 살기 위해 인력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는 믿음이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나.
“개별 기업 차원에서는 답이 없는 것 같고, 간단하게 물어보자. 그렇게 임금 깎고 노동시간 늘리려면 뭐하러 경제 발전했나. 다 같이 더 잘 살아보자고 경제 발전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퇴행하려고 하나. 임금 깎고 노동시간 늘리면 당장 기업 이익은 늘어나겠지만 지금 우리나라 봐라. 수출 의존도가 높아서 가장 먼저 휘청거리지 않는가.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생각인가.”
– 기업 입장에서는 당장 인건비 절감의 유혹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그걸 넘어서려면 선도적인 연구개발 투자와 기술력 확보가 필요하다. 그게 안 되는 기업들이 인금을 깎으려고 든다. 비정규직을 늘리려고 든다. 사회적으로는 복지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으면 노동자들도 개별 직장과 싸울 이유가 없다. 다른 직장을 찾으면 되니까. 한 직장에서 잘려도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잘리면 갈 데가 없다. 그러니까 공장 점거하고 싸우는 것 아닌가. 불행한 일이다. 정부 차원의 해법이 필요하다. 재교육 시스템도 강화해야 한다. 다양한 취업의 기회를 열어주면 노동 유연성도 확보된다. 말로만 노동 유연성을 떠들지 말고 정부가 그런데 아낌없이 지원을 해줘야 한다.”
– 정부 주도의 연구개발 투자도 필요하지 않을까.
“사실 미국이 정부 주도의 연구개발 투자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우리나라는 이 비율이 매우 낮다. 사실 그거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인데 기술력을 확보하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다.”
–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재벌과 사회적 대타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를 테면 삼성그룹의 후계구도를 인정해주는 대신 고용 창출과 연구개발 투자를 끌어내자는 주장이었는데 벌써 5년이 지났고 상황도 많이 바뀌었다. 아직도 가능한 모델이라고 생각하나. .
“외환위기 이후 주식시장을 활짝 열어놓고 생각없이 지냈는데 2003년 SK그룹에 소버린 사태가 터졌다. 주요 재벌 대기업에 경영권 위협이 실제로 있었다. 그때 생각한 건 이들에게 이게 약점이니까 경영권을 보장해주고 사회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게 있겠다고 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재벌이 금융 자본화하고 있다. 경영권 위협은 여전히 있다고 봐야겠지만 그리 다급한 상황은 아니다. 물론 아직도 타협의 여지는 있다고 본다. 안 된다고 될대로 되라고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극단적인 대립이 아니라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받아낼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는 이야기다.”
– 주주 자본주의를 극복할 다른 대안이 있을까. 정부가 주주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나.
“지금 정부에 크게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어떻게든 바뀔 거라고 본다. 이미 한계가 드러나지 않았는가. 이대로 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이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단기적으로는 답이 없다. 지금은 비를 피하는 수밖에 없다. 홍수가 났는데 지금 와서 도랑 파고 바가지로 물 퍼나르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겠나. 일단 비상수단은 써야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근본적인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그걸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비가 조금이라도 갰을 때 지붕을 수리해야 한다. 복지를 늘려야 하고 내수 기반을 확충해야 한다. 연구개발 투자를 늘리고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답이 없다. 이 위기는 굉장히 오래 갈 수도 있다. 근본적인 해법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계속 고꾸라지고 계속 더 힘들어질 것이다.”
얼마 전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봤었는데요, 오늘 인터뷰 기사는 그 책의 핵심 요약본 인듯 합니다. 책이 출간된지 몇 년이 지났지만 장교수님이 했던 말 또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군요. 사회의 대통합이 너무 절실한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