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의 김용철 변호사가 낸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는 우리 사회의 아킬레스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왜 주요 언론사들이 이 책 광고를 거부했는지 그런데도 이 책이 왜 온라인 서점 판매 순위 1위를 기록하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에는 특권계급의 끈적끈적한 연대, 추락한 원칙과 정의, 언론의 비겁한 침묵 등 눈부신 성장신화 이면의 초라한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특검과 법원은 이건희 전 회장 일가에게 면죄부를 줬다. 이 사건은 일단락된 것처럼 보이지만 풀리지 않은 과제가 여전히 많다. 김 변호사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선 주목할 부분은 삼성그룹이 계열사들을 동원해 천문학적인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다는 의혹이다. 김 변호사는 “구조본 재무팀 관재부서에 있는 30대 초준반의 과장들이 프랑스제 델시 청회색 초대형 여행용 가방에 들어있는 현금을 수시로 본관 지하주차장에서 27층 비밀금고로 날랐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른 직원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서 운반하지만 구조본 직원들은 대개 운반 장면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조성된 비자금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용철 전 청와대 민정2비서관(변호사)이 이경훈 전 삼성전자 상무로부터 500만 원짜리 현금 다발을 선물로 받았다가 돌려준 사실이 공개된 적도 있고 추미애 민주당 의원이 삼성 직원이 들고 온 1억원이 든 골프 가방을 돌려보냈다는 증언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검찰은 이들에 대한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았다.

추미애 의원의 경우는 김 변호사가 공개한 “회장 지시사항”이라는 문건에도 적혀 있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이 전 회장은 “추 의원처럼 돈을 안 받는 사람에게는 호텔 할인권 등을 주면 부담이 없지 않을까”하고 제안했다고 한다. 문건도 문건이지만 뇌물을 직접 건넨 김 변호사의 증언이 완전히 무시됐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이귀남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떡값 검사 명단에 오른 검사들은 이명박 정부 들어 오히려 승진을 거듭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자신이 직접 떡값을 건넨 사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어떤 이들은 검사에게 고작 몇 백만원을 찔러주느냐며 놀랐지만 나는 고작 몇 백만원 때문에 양심을 파는 검사들을 보면서 놀랐다”고 삼성과 검찰의 유착을 폭로했다. “기자들에게 뿌리는 돈의 규모는 검사들보다 적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김 변호사는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부끄러운 짓도 몇 번 하다보면 아무렇지도 않아진다”고 털어놓고 있다.

아무개 대법관에게 150만원 상당의 굴비 선물세트를 보냈다거나 계열사 사장과 골프를 치고 왔더니 주머니에 2천만원 상당의 상품권이 들어있었다거나 중앙일보 출신인 정천수 구조본 고문이 법조계 돈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는 등의 증언이 있었지만 아무런 수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김 변호사가 직접 3억원의 현금을 들고 가 전달한 사례도 소개돼 있다. 김 변호사는 “들어 올리기조차 힘들어서 바퀴째 끌고 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특검 과정에서 공개된 ‘SDI 메모랜덤’이라는 문건은 그룹 차원에서 어떻게 비자금이 조성됐는지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해 준다. 이 문건에 따르면 삼성SDI는 삼성물산 영국 법인에서 물품을 구매할 때 전체 거래금액의 15.8%를 샘플비라는 명목으로 돌려 받는다. 삼성은 이를 두고 말 그대로 샘플 제작비라고 설명했지만 정말 그렇다면 이를 돌려줘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게 김 변호사의 설명이다.

특검은 이 문건에 대해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았고 언론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김 변호사는 “삼성테크윈의 경우는 백화점 여성의류 영수증을 이용했고 삼성중공업과 삼성코닝 등은 매출을 조작하는 방법을 썼다”고 폭로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이렇게 조성된 비자금은 임원들 차명계좌에 입금돼 관리됐고 차명으로 부동산을 구입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김 변호사의 폭로는 구체적이고 개연성도 충분했지만 검찰은 이를 무시했다.

삼성화재가 고객들에게 지급해야 할 보험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도 제기됐지만 역시 구체적인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검찰은 엉뚱하게도 황태선 전 삼성화재 사장을 기소했고 황 전 사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횡령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황 전 사장은 징계는커녕 여전히 삼성 사장단협의회 산하 사회공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구조본 지시에 따라 이뤄진 범죄라는 점을 인정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특검은 이 전 회장이 차명으로 관리해 온 재산이 4조5천억원이라고 발표했는데 사실 이게 이 전 회장의 재산인지 삼성 계열사들이 조성한 비자금인지는 밝혀진 바 없다. 특검과 법원은 이 출처불명의 비자금을 모두 이 전 회장의 재산으로 인정해줬다. 특검 덕분에 이 전 회장은 삼성생명의 최대주주로 올라섰고 에버랜드가 금융지주회사가 되는 부담을 벗어버리게 됐다. 덕분에 삼성생명 상장도 가능하게 됐다.

삼성 임원들이 자주 이용하는 안양 베네스트 골프장의 내방객 명단이 모두 필명으로 작성되며 그나마도 날마다 폐기된다는 증언도 놀랍다. 김 변호사는 나중에 삼성 비자금 사건 재판을 맡게 된 서기석 판사와도 이 골프장에서 함께 골프를 쳤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서기석 판사는 삼성그룹 비자금 담당이었던 최광해 부사장과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황백 제일모직 사장 역시 이들과 동문이다.

이 전 회장 대신 죄를 뒤집어 쓴 허태학 전 삼성석유화학 사장이 “6대 종손이 전과자가 된다”며 아우성을 쳤다거나 이학수 구조조정본부 본부장이 “판사에게 30억원쯤 갖다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는 등의 증언 역시 놀랍다. 태평로 빌딩에 마련된 안가에서 재판에 출석할 증인들을 불러다 교육을 시켰다거나 말 주변이 없는 증인들을 해외로 도피시켰다는 내용 역시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매우 구체적이고 개연성이 충분한 정황 사실들이다.

김 변호사는 “삼성 재판을 지켜본 우리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고 생각하게 될까봐 이 책을 썼다”고 적고 있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김인국 신부의 말을 인용해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는 속세의 상식을 깨고 “승리하는 불의 보다는 패배하는 정의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불의한 양심에도 진실은 있다”는 1부의 제목이 김 변호사의 속내를 가장 정확히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주장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 내부 고발자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설령 그가 비열한 배신자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야기하는 진실이 무시돼서는 안 된다. 이를 규명해야 할 책임은 일차적으로 검찰과 법원에 있었지만 이들이 손을 털고 물러난 지금은 언론에 있다. 김 변호사는 묻는다. 과연 이 땅에 제대로 된 언론이 있는가.

우선은 삼성 계열사들 사이에 이뤄지는 광범위한 비자금 조성 의혹을 좀 더 파고들 필요가 있다. 논란이 됐던 삼성물산과 삼성SDI 영국 법인의 거래 내역부터 시작해서 부당 내부거래를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 기업 기밀이라 공개되지 않는 자료가 대부분이지만 삼성SDI나 삼성물산 건설부문 등을 경유하는 자금 흐름을 면밀히 살피면 단서가 잡힐 수도 있다. 사업보고서 등 공개된 자료를 활용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삼성생명의 지분변동 내역 역시 처음부터 다시 조사할 필요가 있다. 비상장 회사인 탓에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지만 주주총회 의사록 등을 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특검과 법원의 발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1987년과 1988년을 비교하면 대주주였던 신세계와 제일제당의 지분이 절반으로 줄어든 반면 실권주의 행방이 묘연하다. 이를 밝혀내는 것이 특검과 법원의 거짓말을 밝혀내는 출발점이 될 전망이다.

옛 구조본, 전략기획실이 해체되고 이 전 회장이 물러난 상태지만 과연 계열사들이 독립적인 경영을 하고 있는지도 취재가 필요한 대목이다. 김 변호사의 증언에 따르면 계열사 사장들이 구조본 팀장에게 쩔쩔맬 수밖에 없는 건 임원 인사권을 이 전 회장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 회장의 퇴임 이후 무엇이 바뀌었을까. 이 전 회장의 복귀가 거론되고 있는 지금, 사라지고 없는 구조본을 대신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전 회장이 지난해 법원 판결을 앞두고 에버랜드와 삼성SDS에 각각 969억원과 1539억 원을 지급했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도 추가 취재가 필요하다. 경제개혁연대에 따르면 이 금액은 이 두 회사에 입금되지 않았다. 회계 장부에도 기록되지 않았고 자금출처 역시 밝혀진 바가 없다. 이미 납부했거나 납부할 계획이라고 밝힌 6630억원의 세금 역시 출처가 궁금하지만 이에 대해 취재하고 파헤친 언론은 한 군데도 없었다.

사회부 기자라면 안양 베네스트 골프장 부킹 기록이 권력과 자본의 유착을 잡아내는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다. 누가 비용을 치르는가도 중요하겠지만 누가 누구와 어울리는가도 중요하다. 통계를 다루는데 능숙한 기자라면 주요 재판에서 판사와 검사, 변호사의 출신 학교가 재판의 승패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 살펴볼 필요도 있다. 이른바 떡값 명단에 오른 법조인들의 과거 재판 기록 역시 흥미로운 취재 소스가 될 수 있다.

이밖에도 배호원 전 삼성증권 사장이 비자금 계좌를 부당 폐기해 증거를 인멸하고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사실이나 삼성SDS가 직원들을 도청했다는 의혹과 관련, 김 변호사가 추가 정황을 제시한 대목 등도 주목할 만하다. 구조본 차원의 범죄 사실에 연루된 임직원들이 퇴출은커녕 승진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한창 화제를 불러모았던 이 전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의 미술품 수집 취미와 관련한 여러 의혹에 대해서도 파고들 필요가 있다.

김 변호사의 책에는 취재거리가 널려있다. 삼성 뿐만 아니라 검찰과 법원, 정치권, 언론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부패와 부실이 망라돼 있다. 경향신문이 최근 김 변호사의 책 소개기사를 삭제해 논란을 빚었는데 이 신문의 기자들이 성명에서 “왜 이명박은 조지면서 삼성은 조지지 못하느냐”고 항의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사실 김 변호사의 문제제기를 방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든 기자들에게 해당한다.

Similar Posts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