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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9세의 유문.

이병주의 ‘행복어 사전’을 세 번쯤 읽은 것 같다. MBC에선가 약간 유치한 트렌디 드라마로 만들어진 적이 있는데 실제로는 꽤나 무게감 있는 소설이다. 이병주의 최고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1986년 초판, 등장인물이나 설정, 전개 방식 등이 모두 매력적인 소설이다. 원래 세 권 짜리였는데 나중에 다섯 권짜리로 다시 찍었다. 그 중간에 덴마크 왕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나온다. 파일 정리를 하다가 전에 메모해 둔 걸 찾아서 인용한다.

프레데릭 9세의 유문 / 이병주, ‘행복어 사전’ 가운데.

우리나라에 있어서 왕은 고궁에 서 있는 비석이다. 유럽의 왕들은 역사의 이끼라고나 할까.

스웨덴의 국왕은 대학생들의 유희적인 데모의 대상으로 가끔 기사거리가 되고 영국의 왕실은 황태자와 황녀의 스타적인 행동으로 간혹 뉴스프런트에 나타난다.

우리는 전설의 주인공처럼 노르웨이의 전왕 해해콘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84세 때 탄생 기념으로 국민들이 어떤 선물을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20톤짜리 요트를 하나 가졌으면 한다고 수줍게 말했다는 것이다.

지난주에 서거한 덴마크의 프레데릭 9세도 이러한 종류의 왕이었다. 신장 6피트6인치란 거대한 체구는 왕이란 한직을 감당하기엔 버급했다. 왕이란 직위 때문에 그는 위대한 음악가로서의 꿈을 포기해야 했고. 바이킹의 의기를 발휘할 해군을 단념해야 했다. 권태를 달래기 위해 그는 궁성의 창가에 서서 발틱 해를 지나가는 기선의 선장에게 회중전등을 깜박거려 모르스 신호를 보내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트보리 공원을 돌기도 했다.

그러한 어느날 공원의 벤치에서 여행자를 만나 잡담을 나눴는데 시카고의 점포주란 여행자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그는 답하길, “나는 이 나라의 국왕이요.”

그러나 이러한 일화 정도로써 극동에 있는 우리들이 극서의 왕에게 대단한 매력을 느낄 까닭은 없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프랑클의 ‘밤과 안개’, ‘안네 프랑크의 일기’ 등을 통해 2차대전 중 나찌 독일이 유태인에에 얼마나 포악한 짓을 했는가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당시 나찌 독일은 어떤 나라이건 점령하기만 하면 첫째의 포고로서 유태인들에게 ‘다비데의 별’이라고 불리우는 황색완장을 두르도록 강요했다. 필요에 따라 유태인을 격리하여 강제 수용소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만일 유태인이 그 완장을 두르지 않거나 완장을 두르지 않은 유태인을 밀고하지 않거나 하면 본인은 물론 그 이웃까지 가혹한 형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홀랜드에서도 폴란드에서도 체코에서도 헝가리에서도 이 때문에 유태인들은 처참한 화를 입었다. 덴마크를 점령한 독일군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점령사령관은 서릿발 같은 포고를 내렸다. “유태인은 누런 완장을 달아라. 이 명령을 위배하면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한다.”

나찌 독일의 명령 시행은 엄격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의 눈엔 왕도 귀족도 그밖의 어떤 세력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 포고가 있자 이튿날 덴마크의 국왕, 즉 프레데릭 9세의 선왕이 ‘다비데의 별’을 팔에 두르고 거리에 나왔다. 이에 황태자였던 프레데릭 9세가 아버지를 따라 그 완장을 달고 매일처럼 거리로 나왔다. 이것을 본 덴마크의 국민들은 국왕과 황태자의 뜻을 알아차리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유태인이란 표지가 되는 완장을 둘렀다.

그렇게 되니 독일군은 덴마크에선 유태인을 가려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덴마크 국민 전부를 강제수용소에 보낼 수도 없었다. 그런 때문에 덴마크에선 한 사람의 유태인도 희생되지 않았다.

사령관과 황태자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응수가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전하는 왜 그 완장을 둘렀는가.”

“나도 유태인일지 몰라서 둘렀다.”

“왕가는 유태족이 아니라는 역사적 증명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러나 내 피의 몇 퍼센트가 될진 모르지만 유태인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단언할 순 없다.”

“그건 우리 포고에 대한 반항이 아니냐.”

“당신들의 포고에 충실한 까닭으로 이 완장을 둘렀다.”

“빨리 그 완장을 떼시오.”

“그렇겐 못하겠다. 누구도 내 피에 유태인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왕과 황태자의 용기가 덴마크에 있어서의 유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 것이다. 역사의 이끼가 돌연 바위가 되어 그 바위가 덴마크 국민을 수호한 성벽이 된 셈이다.

나는 코펜하겐의 왕성을 둘러 발틱의 해변으로 빠지면서 이 얘기를 회상하며 감상에 잠긴 적이 있는데 그때 프레데릭 왕은 이와 같은 나그네의 시름을 알 턱 도 없이 조용히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프레데릭 왕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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