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패 등 현실불만 세력 광주에 내려가 유언비어 날조.”
1980년 5월 광주에 언론은 없었다. 언론은 계엄사령부의 보도자료를 받아쓰면서 시위에 가담한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붙이면서도 계엄군의 발포 사실은 침묵했다. 조선일보는 5월22일 “광주지역 소요가 악화된 원인은 전국적인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서울을 이탈한 학원소요 주동학생 및 깡패 등 현실불만 세력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사실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뜨린데 그 원인이 있다”고 계엄사령부의 발표를 인용해 보도하기도 했다.
언론은 시민군의 총기 탈취와 방화 등 과격시위에만 초점을 맞췄다. 경찰과 군인들의 사망자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기사가 나가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27일 “국군이 선량한 절대다수 광주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라면서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비상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철저한 보도통제의 결과였지만 방송의 경우는 왜곡이 더욱 심했다. 북한군의 무력 훈련 장면을 반복해서 비춰줬고 피 흘리는 계엄군과 시민군의 무장시위 장면을 교차 편집했다. 시민들이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배경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총을 난사했던 이 끔찍한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끝난 1987년에서야 비로소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전두환 신군부는 10·26 사태 이후 철저하게 언론을 통제했다. 언론사에 상주하고 있는 검열관들이 ‘검열 필’이라는 도장을 대장에 찍어줘야 인쇄를 할 수 있었고 7개월 가까이 검열이 계속되면서 자기검열이 자리 잡고 있었다. 5월16일 배포된 보도지침에는 “학생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지지하는 식의 기사는 모두 불가”, “동료가 부상하자 경찰도 흥분, 학생들과 육탄전에 가까운 근접전투 벌였다 등은 불가” 등의 원칙이 적시돼 있다.
그해 5월 광주에서 언론의 역할을 대신했던 건 시민들이 만든 ‘투사회보’와 ‘민주시민회보’였다. 투사회보는 광주 서구 광천동에 위치한 들불야학의 교사와 학생들이 모여 만든 B5 용지 1장짜리 유인물이었다. 21일 1호가 발간돼 25일 8호까지 발간됐고 ‘해방광주’ 이후 민주시민회보로 이름을 바꿔 9호와 10호까지 발간됐고 11호는 배포되기 전에 전량 압수됐다. 투사회보는 5천부, 민주시민회보는 1만5천부 정도가 인쇄됐다.
투사회보는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의 피끓는 감정을 생생하게 증언해 준다. 21일 발간된 1호에는 “놈들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면서 “각 동별로 동사무소 장악, 동별로 집합”, “오후 3시부터 도청으로 진격하라”, “무기를 제작하라” 등의 행동강령과 함께 “우리는 피의 투쟁을 계속한다”는 등의 과격한 문구가 등장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과격한 선동보다는 조금씩 질서를 잡아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23일 발간된 5호에서는 “최규하 정부는 즉각 물러가라”, “전두환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라”,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 구속중인 학생과 모든 민주 인사들을 즉각 석방하라”, “구국 민주 과도정부를 즉각 구성하라” 등의 정치적인 구호가 등장한다. 24일 발간된 6호에서는 “중고등학생들의 무기 소지를 금지한다”, “계엄군이 발포하지 않는 한 우리가 먼저 발포하지 않는다”는 행동강령도 적시돼 있다.
주류 언론이 철저하게 광주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가운데 투사회보는 유일한 신문의 역할을 했다. 투사회보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투사회보 배포와 함께 취재활동을 병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6호에는 “현재 병원에서 확인된 시체가 102명, 변두리에 버려진 시체, 군인들이 실어 간 시체가 550명, 합계 6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중상자 500여명, 경상자를 포함, 총 2천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이들은 투사회보를 통해 계엄령을 철폐할 것, 살인마 전두환을 처단할 것, 구속 중인 학생과 시민, 민주인사들을 즉시 석방하고 구국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 요구했다. “정부와 언론은 이번 광주의거를 허위조작, 왜곡보도 하지 말라”면서 “이상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우리는 끝까지 투쟁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투사회보는 이들이 체제전복을 노리는 무장폭도가 아니라 민주화를 열망하는 평범한 시민들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기록이다.
24일 배포된 “전국 민주시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에서는 고립된 광주 시민들의 절박함이 드러난다. “80만 광주시민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고 또 울었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오, 처절하고 참혹함이여. 인간 세상에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억누를 길 없는 울분으로 목이 메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메임은 또한 치솟아오르는 분노와 의기의 함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목이 메이도록 외치고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25일 배포된 “최규하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에서는 “이번 사태는 정부의 잘못임을 시인해 주시고, 사과와 용서를 청해 주시옵고, 이미 약속하셨지만, 모든 피해에 대하여 정부가 보상하고, 어떤 보복조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옵기 피눈물을 삼키면서 간곡히 간언드린다”고 밝히고 있다. 그날 도청에서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자는 쪽과 끝까지 저항하자는 쪽이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26일 저녁 150여명이 도청에 남아 계엄군에 맞선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도청을 넘겨준다는 것은 먼저 죽은 사람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일이며 누군가는 남아서 계엄군과 맞서 싸우고 죽음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도청에 남아있었던 사람들 상당수가 구두닦이나 넝마주이, 일용직 노동자 등 가진 것 없고 못 배운 밑바닥 민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도청 사수파’였던 민주시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을 맡고 있었던 윤상원 열사는 25일 아침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들불야학 강학으로 투사회보의 편집장 역할을 맡았던 윤상원은 5·18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던 많지 않은 엘리트 가운데 한명이었다. 국내 언론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지만 윤상원의 인터뷰는 외신을 타고 세계 곳곳에 전해졌다.
미국 볼티모어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1994년 월간 ‘샘이 깊은 물’에 기고한 글에서 그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투사회보는 국내 최초의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였을지도 모른다. 주류 언론이 침묵하거나 왜곡 보도를 일삼고 있는 가운데 이에 분노하는 독자들이 직접 콘텐츠의 생산자가 되고 진실을 고발하고 독자들과 상호 소통하고 행동을 끌어내는 투사회보의 계보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서 와이브로와 디지털 카메라로 무장한 수많은 시민기자들의 활약으로 이어졌다. ‘군화발’과 ‘물대포’ 동영상 등이 모두 시민기자들의 특종이었다.
“그해 5월 광주는 민주화의 열망으로 들끓었다.”
‘투사회보’ 제작에 참여했던 서대석 전 청와대 비서관.
서대석 전 청와대 비서관은 1980년 5월 전남대 2학년 재학 중으로 들불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투사회보를 제작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았다가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5·18민중항쟁동지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고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 등을 지냈다. 서 전 비서관은 “신문도 끊기고 방송이 우리를 폭도로 내몰았던 그때 투사회보가 유일한 언론이었다”고 말했다.
서 전 비서관에 따르면 투사회보는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인쇄했다. 엄밀히 말하면 인쇄가 아니라 동판에 철필로 직접 써서 등사기에 미는 완전 수작업이었다. 하루 밤을 새면 5천장 정도를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B5용지 크기로 일간 형태로 발행됐는데 저녁에 편집 작업을 마치면 밤새 인쇄를 마치고 아침에 배포했다. 들불야학의 교사와 학생들이 나서서 배포와 함께 시내 곳곳을 돌면서 취재 작업을 병행했다.
– 투사회보를 어떻게 만들게 됐나.
“들불야학 선배였던 윤상원 열사가 제안했다. 처음에는 집회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였지만 계엄군의 발포 이후에는 시민들의 동요를 막고 질서를 잡기 위한 목적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그러려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볼 때는 폭도들 무법천지인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투사회보를 통해 드러난다.”
– 시민들 반응은 어땠나.
“폭발적이었다. 종이쪼가리 한 장이지만 5천장 정도 찍었는데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마구 뿌리지는 못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서 1천장 정도 나눠줬다. 나중에 민주시민회보로 바뀌면서는 도청 앞 YWCA로 옮겨서 제대로 된 등사기로 인쇄를 했다. 그때는 1만5천에서 2만부까지 찍었던 걸로 기억한다. 인쇄용지가 부족했는데 외상으로 얻어왔던 기억이 난다. 투사회보를 찍을 거라고 하니까 트럭 가득히 인쇄용지를 실어줬는데 그 외상값은 결국 갚지 못했다.”
– 광주 MBC에 불을 지른 사건도 있었는데.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두둘겨 맞는 걸 보고 있는데 오히려 폭도로 몰아붙였으니 화가 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소 정도는 아니었고 항의 차원이었다고 본다. 오히려 상당수 사람들은 서로 자제하자는 분위기였다. 예비군 무기고를 털고 군용 트럭 등을 훔쳐 타고 나오기도 했기도 했지만 무법천지는 아니었다. 아주머니들이 주먹밥을 만들어와 나눠주기도 했고 21일 이후 ‘해방광주’는 오히려 더 없이 평화로운 분위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 27일 새벽에는 어디에 있었나.
“계엄군이 다시 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동자들은 대부분 광주를 빠져나갔다. 실제로 그날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그 사람들은 이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죽음으로써 그걸 증명하려고 했다고 본다. 나는 8개월 정도 징역을 살다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명예회복은 됐지만 여전히 그해 5월 광주는 풀리지 않은 과제들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간단 요약.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18년 이상 장기 독재를 이어오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9년 10월26일 자신의 심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진 뒤 전국적으로 민주화의 열망이 끌어올랐다. 그러나 그해 12월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주축으로 한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면서 이른바 ‘서울의 봄’이 시작됐다. 민주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던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표현이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이듬해인 1980년 5월17일 전두환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제대로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무참하게 꺾였다. 신군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등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을 전격 체포해 수감했고 전국의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군인들을 풀었다. 이른바 운동권 대학생들도 대거 연행됐다. 이날 저녁 광주에서는 곳곳에서 횃불시위가 벌어졌다. 이게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이었다.
계엄군은 5월18일 아침 전남대에서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했고 “계엄령을 해제하라”, “휴교령을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을 곤봉으로 진압했다. 학생들은 금남로로 옮겨갔고 시위에 참석한 시민들이 불어나면서 계엄군의 진압의 강도도 더욱 높아졌다. 다음날은 공수부대까지 투입되면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금남로에서는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20일 저녁에는 시위대가 탄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해 경찰 4명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 성난 시위대가 광주 MBC 건물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급기야 이날 저녁 계엄군이 광주역 광장에서 총을 난사해 시민 2명이 사망했다. 시민들은 예비군 무기고를 털어 무장봉기를 시작했다.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 2만여명이 계엄군과 공방전을 벌였고 21일에는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해 수십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21일 저녁 계엄군이 일시 철수하면서 광주는 이른바 해방공간이 됐지만 그 평화는 길지 않았다. 시민 5만여명이 도청 앞 광장에 집결했고 계엄군은 헬기를 동원해 경고문을 뿌리면서 해산을 권고했다. 26일 저녁에는 시내전화까지 전면 불통됐고 계엄군이 다시 진격해 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기록과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이날 도청에는 157명의 시민군이 남아 목숨을 걸고 계엄군과 맞서 싸웠다.
27일 새벽 계엄군은 탱크를 몰고 들어와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시민군을 진압했고 10일에 걸친 광주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1988년 진상조사 결과 사망자는 191명, 부상자는 852명으로 최종 집계됐다. 6·25 전쟁 이래 최대의 희생자를 낸 사건이었다.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그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서 상임위원장이 된 뒤, 8월 대장으로 진급했다가 곧바로 예편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11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미디어오늘 7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