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이었다.” 참여연대 협동사무처 이태호 처장은 27일 공개된 러시아 조사단의 천안함 보고서를 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이 처장은 “러시아 조사단이 제기한 의혹은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꾸준히 제기됐던 문제들이지만 이처럼 우리 정부의 입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보고서를 낸 건 충격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 처장은 “이로써 천안함 사건은 전면 재조사가 불가피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외교 전문가들은 천안함 사건을 참담한 외교적 실패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홍익표 연구원은 “러시아가 우리 정부를 배제하고 미국과 중국에만 보고서를 건넸다는 게 더욱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홍 연구원은 “우리 정부의 신뢰가 크게 추락한 것도 문제지만 동북아시아 외교 지형에서 우리 정부가 배제됐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홍 연구원은 “이번 사건으로 우리나라의 외교적 영향력은 크게 축소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홍 연구원은 “애초에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등은 천안함의 진실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면서 “우리 정부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치열한 이해관계 대립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동시에 미국의 영향력을 경계하는 중국과 러시아가 우리 편에 설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다는 이야기다. 한국이 미국의 우산 아래 뛰어드는 모양새가 되면서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홍 연구원은 “거슬러 올라가면 1988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7·7선언 이후 우리 외교는 미국 일변도의 대외 정책에서 다자 외교로 발전해 왔는데 이번 사건은 그런 기조를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고 지적했다. 홍 연구원은 “단기적으로는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겠지만 이미 중국 의존도가 갈수록 더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을 고립시키면서 결과적으로 중국과 맞서는 이런 전략은 매우 위험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한국 외교가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 전문가들은 정부의 소통 부재와 언론의 직무 유기를 원인으로 꼽는다. 이 처장은 “정부는 국민들의 합리적인 문제제기를 묵살했고 언론은 충분히 의심할 만한 정부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받아 적는 데 익숙했다”고 지적했다.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에 조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도 “주류 언론의 제대로 된 비판이 있었다면 이 사건을 국제무대로 들고 가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외교 문제를 특정 정당과 정파에 유불리 문제로 해석하고 국내 정치로 풀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특히 이명박 정부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겪으면서 민주주의적 소통이 굉장히 비효율적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정보를 통제하고 소통을 가로막는 권위주의 시대로 퇴행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조작 의혹까지 거론, 천안함 전면 재조사로 가나.
“합조단은 조사주체가 아니라 조사대상”… 프로펠러·지진파 등 규명 필요.
러시아 조사단이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미국과 중국 등에 보낸 사실이 확인되면서 천안함 사건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27일 한겨레가 공개한 러시아 조사단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 조사단은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는 합조단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러시아 조사단은 천안함이 좌초 후 기뢰 폭발로 침몰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 정부는 당초 기대에는 크게 못 미쳤지만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 의장 성명을 끌어낸 것을 소기의 성과로 평가해 왔다. 굳건해진 한미동맹을 과시하면서 동해에서 대대적인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펼치고 이를 계기로 대북 압박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보고서가 공개되고 합조단 조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외신 보도가 쏟아지면서 정부의 운신의 폭이 좁아지게 됐다. 대북 강경 기조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천안함 사건의 전면 재조사를 요구하는 국내외 여론을 마냥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지금까지 합조단이 제시한 증거 자료들 대부분이 뒤집혔거나 과학적 논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합조단은 계속해서 말을 바꾸거나 군색한 변명으로 일관해 왔다. 엉뚱한 도면을 잘못 제시한 사실이 드러나 망신을 산 적도 있다. 러시아 조사단은 심지어 합조단이 제시한 일부 증거에 대해서는 조작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우선 합조단은 오그라든 프로펠러를 설명해야 한다. 합조단은 지난달 20일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언론단체 설명회에서 “프로펠러가 급정거 할 경우 관성력에 의해 회전 방향으로 날개 끝 부분이 오그라들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사실 우리도 잘 이해는 안 된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합조단 관계자는 “비용 문제도 있고 이미 확실한 증거 자료가 확보돼 있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을 의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합조단이 확실한 증거라고 제시한 어뢰 추진체는 이미 증거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러시아 조사단은 “합조단이 제시한 어뢰 추진체는 육안 감식 결과 6개월 이상 물 속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사고와는 무관한 조작된 증거일 가능성을 시사한 셈인데 이로서 합조단은 신뢰에 엄청난 손상을 입게 됐다. 러시아 조사단은 이밖에도 프로펠러 표면이 사고 이후 인위적으로 깎여나갔을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러시아 조사단은 이밖에도 CCTV 동영상이 끊긴 시각과 승조원이 구조 요청을 한 시각 등이 합조단이 제시한 사고 시각과 다르다는 사실의 의문을 제기했다. 이 같은 의문은 그동안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제기된 바 있으나 합조단은 KNTDS(해상전술지휘시스템) 항적 자료나 교신 내역 등을 공개하지 않아 의혹을 키워왔다. 물기둥과 섬광을 둘러싼 논란도 속 시원한 해명이 없었고 매번 뒤집혔다.
전체적으로 조사가 부실했다는 지적도 계속되고 있다. 합조단 조사위원 가운데 지진파 전문가가 단 한 명도 없었고 어뢰 추진체의 부식 상태 역시 육안 감식 외에 제대로 된 분석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1번이라고 적힌 파란색 매직 글씨에 대해서도 ‘솔벤트 블루 5’라는 성분이 포함돼 있다고만 밝혔을 뿐 글씨가 적힌 시점이나 변질 상태 등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국민들이 천안함 조사에 의혹을 풀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참여연대 협동사무처 이태호 처장은 “러시아 조사단이 합조단이 제시한 증거를 전면 부정하고 좌초 후 기뢰 폭발 또는 한국 어뢰에 의한 침몰 가능성까지 거론하면서 합조단 조사는 신뢰를 잃게 됐다”면서 “전면 재조사가 불가피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언론단체 검증위 노종면 책임위원은 “합조단은 조사주체가 아니라 조사대상이 돼야 하며 국정조사를 통해 합조단의 조사과정과 결과 전반에 걸쳐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하다”고 주장했다.
합조단 조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는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과반수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국정조사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고 국민적 합의를 전제로 정부 차원에서 재조사를 결단하는 것이 합리적인 수순”이라고 지적했다. 신 대표는 “지금까지 1번 어뢰의 진위 여부가 핵심 쟁점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천안함의 이동 경로를 비롯해 사고 당시 상황을 원점에서부터 재구성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