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4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대학로에서는 주변 상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인테리어 공사를 하던 피자가게가 문을 열고 보니 기업형 슈퍼마켓으로 변신해 있었다. 공사 현장에는 버젓이 ‘피자가게를 개점할 예정’이라는 현수막까지 걸려 있었다. 인근 중소자영업자들은 중소기업중앙회에 사업조정 신청을 낼 계획이지만 사업조정이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이야기에 속을 태우고 있다.
공룡처럼 주변 상권을 싹쓸이 하는 기업형 슈퍼마켓, 이른바 SSM의 시장 진입을 규제하는 법안이 1년 가까이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그동안 SSM은 동네 상권을 야금야금 장악해 들어가고 있다. 10월 말 기준으로 올해 들어 개설된 SSM은 모두 99개에 이른다. 기존에 개설된 SSM을 더하면 모두 468개에 이른다. 롯데슈퍼와 롯데마이슈퍼가 237개, 홈플러스익스프레스가 214개, 이마트에브리데이가 17개씩이다.
국회에 계류돼 있는 SSM 관련 법률은 유통산업 발전법과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법이다. 유통법은 재래시장 반경 500m 이내에 SSM 진입을 규제하는 법이고 상생법은 대기업 투자 지분이 51% 이상인 SSM 가맹점도 사업조정 신청 대상에 포함하도록 하는 법이다. 유통이 적용 범위가 제한적인 반면 상생법은 직영점은 물론이고 위탁 가맹점까지 규제하고 있어 좀 더 실효적이라고 할 수 있다.
SSM법 통과가 지지부진한 건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야는 당초 유통법을 먼저 처리한 뒤 상생법을 올해 안에 처리하기로 합의했으나 지난달 25일 민주당이 한EU 자유무역협정과 관련, 통상 마찰을 이유로 유통법 처리를 유보하면서 다시 틀어졌다. 한나라당은 껄끄러운 상생법은 추후 처리하기로 하고 일단 유통법부터 처리하자는 입장인 반면 민주당은 유통법과 상생법을 동시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홍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유통법을 조속히 처리하지 않으면 SSM이 가맹점 형태로 확산될 것”이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늘어놓은 바 있고 박지원 민주당 원내 대표는 “유통법과 상생법의 순차적 통과로 골목 상권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지만,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이마저도 안 된다고 했다”면서 “동시 처리가 아니면 논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에 앞서 김종훈 본부장은 지난달 22일 지식경제부 국정감사에서 “유통법과 상생법이 지금과 같은 개정안으로 올라오면 분쟁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밝혀 논란에 불을 댕겼다. 김 본부장은 “제 어릴 때 구멍가게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고 그 자리에 슈퍼마켓이 들어왔다”면서 “사라진 구멍가게를 지금 살려낼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이날 발언 덕분에 여야 합의는 무너졌고 SSM법은 다시 표류하게 됐다.
SSM 논란의 핵심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상생법은 한EU FTA에 위배된다. 따라서 어느 하나를 포기다. 둘째, 그렇다면 유통법을 먼저 통과시키고 상생법을 한EU FTA 비준 이후로 미루자는 한나라당의 주장은 거짓이다. 셋째, 그러나 한나라당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유통법과 상생법의 동시 통과는 불가능하고 여야 모두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동안 중소영세상인들의 피해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건 언론 보도다. 그동안 SSM 논란에 침묵해 왔던 상당수 언론들이 여야의 논쟁을 단순 중계할 뿐 아무런 입장도 정하지 않거나 양비론으로 일관하고 있다. 한국일보는 “여야 모두 입으론 ‘영세상인 위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양쪽의 입장을 동일하게 전달하는데 그치고 있다. 동아일보도 “상인들 ‘SSM 정치게임 그만’ 반발”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4대상 사업을 둘러싼 예산전쟁의 전초전 양상을 띠고 있다”고 분석하는데 그쳤다.
노골적으로 민주당을 비판하는 곳도 많다. 파이낸셜뉴스는 “소상공인들 ‘국회 믿다 낭패'”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국회는 양당이 합의한 바와 같이 소상공인 업계의 요구를 적극 수용해 유통법과 상생법의 분리처리를 조속히 이행해야 한다”는 업계 관계자의 말을 전하면서 민주당을 압박했다. 매일경제도 “코너에 몰린 민주당”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순차처리에 합의했다가 이를 뒤집으면서 중소 상인들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고 보도했다.
물론 민주당에도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경향신문은 뒤늦게 민주당이 입장을 바꾼 것과 관련, “판단 미스를 자인하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지난 4월 합의 당시부터 상생법과 예산이 연계될 가능성이 제기된 터였다”면서 “그런데도 확실한 보증 없이 합의했다면 안이했거나 무능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한겨레는 “여야가 관련 법안들을 통과시킬 생각이라면 분리처리가 아닌 동시처리로 가닥을 잡아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히는데 그쳤다.
소상공인들 “언론이 본질 호도… 우리는 분리처리 요구한 적 없다.”
한나라당이 상생법을 완강하게 저지하고 있는 건 상생법이 한EU FTA와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특히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여러 차례 상생법이 한EU FTA에 저촉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왔고 이 때문에 민주당이 분리처리 합의를 파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상당수 언론은 유통법이라도 통과돼야 한다고 민주당을 압박하고 있지만 중소 영세상인들은 유통법만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언론 보도와 달리 중소영세상인들은 유통법과 상생법의 동시 통과를 주문하고 있다. 재래시장 인근만 규제하는 유통법만으로는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다. 전국유통상인연합회와 중소상인 살리기 전국 네트워크 등은 최근 성명을 내고 “정부 지원을 받는 일부 상인단체들이 한나라당 입장에 맞장구를 쳐주니까 분리처리가 진리인양 주장을 하고 있지만 어떤 상인들이 두 법안의 즉각적인 동시처리를 원치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들은 “정말 한나라당이 600만 자영업자들을 위한다면 지금 바로 국회 본회의를 열어 유통법과 상생법을 함께 직권상정하고 야당을 불러 합의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유럽연합의 여러 나라들이 자국의 중소상인을 보호하는 법안을 만든 것처럼 정부는 필요한 조치를 마련하고 한EU FTA 재협상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주장은 보수·경제지들 지면에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참여연대 안진걸 간사도 “중소상인들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제 조치조차 정치 공방의 소재로 악용되는 현실이 참으로 실망스럽다”면서 “논란의 당사자인 김종훈 본부장이 ‘분쟁의 소지는 있지만 만일 분쟁이 발생하면 최선을 다해 해결하겠다’며 기존 입장을 거둬들인 만큼 두 SSM 법안을 동시처리 하지 않을 이유도 명분도 없다”고 지적했다. 안 간사는 “여야는 정쟁을 중단하고 오늘이라도 두 법안을 처리해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한나라당이 유통법과 상생법의 분리처리를 주장하는 건 한EU FTA에 저촉되는 상생법을 한EU FTA 비준 이후로 미루려고 하는 속셈인데 그렇다면 한EU FTA 비준 이후에도 상생법의 통과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게 분리 통과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한나라당은 중소기업청에서 상생법에 준하는 SSM 규제 지침을 마련했기 때문에 유통법만 통과돼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이 역시도 한EU FTA에 위배돼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유럽의회가 세이프가드 법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변수다. 만약 우리 정부가 상생법 같은 비관세 장벽을 도입해 한EU FTA 규정을 위배할 경우 긴급 수입제한 조치를 발동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세이프가드는 한EU FTA 협정문과 상충되기 때문에 우리도 먼저 유통법과 상생법을 통과시키고 추후에 EU와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