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사람들이 볼 때는 중국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청자, 백자가 있지 않느냐.”


이명박 대통령이 6일 G20 서울 정상회의 행사장인 삼성동 코엑스를 방문해 했다는 말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각국 정상들이 찾게 될 동선을 따라 걸으면서 실내 집기와 인테리어를 꼼꼼히 챙겼다. 의장석에 앉아 헤드폰과 동시통역 장비 등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직접 살폈다. 휴게실에 들러 “(소파가 서로) 이렇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야기가 안 된다”면서 다시 배치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꼼꼼하고 세심한 대통령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나라를 찾게 될 G19 정상들은 아마도 이 대통령의 완벽한 서비스 마인드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것이고 우리나라의 국격은 껑충 뛰어오를 것이며 국가 브랜드가 재고되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사라지고 덕분에 국내총생산도 늘어나고 일자리도 창출될 것이다. 이 정도면 마음 속에 애국가가 울려 퍼질 만도 하지 않은가. 참고 : 장학사님 오시나… G20 호들갑 국제 망신. (이정환닷컴)

그러나 이 대통령이 만약 이번 G20 서울 정상회의를 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하고 싶다면 회의장의 인테리어보다는 회의 의제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이번 G20 정상회의의 최대 관심은 미국과 중국의 환율 갈등이기도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지금까지 잘 살았던 나라들과 지금까지 가난했지만 앞으로 잘 살게 될 나라들의 갈등이다. 이들의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고 서로 ‘윈윈’하는 해법을 찾느냐가 이번 G20 정상회의의 과제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철저하게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지난달 경주에서 열렸던 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우리나라는 시장결정적 환율제도를 도입하고 경상수지 목표를 도입하자는 합의를 끌어냈다. 그 결과는 어땠나. 어렵사리 합의를 끌어낸 것 같았지만 미국은 지난주 무려 6천억달러의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달러화 가치를 끌어내려 미국의 부실을 다른 나라에 전가, 경주 합의를 전면 부정하는 조치였다.

환율 전쟁은 사실 미국이 만든 프레임이다. 미국이 세계 유일의 기축 통화인 달러화를 마구 찍어내면서 부실을 키우자 다른 나라들이 궁여지책으로 환율을 끌어올리면서 빚어진 갈등이다. 미국은 1985년의 플라자 합의처럼 미국과 무역에서 막대한 흑자를 얻고 있는 나라들이 인위적으로 환율을 끌어내릴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15년 전 일본과 달리 중국은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듣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졌다.

G20 정상회의의 과제는 단순히 환율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그치지 않는다. 환율 전쟁이라는 프레임에 말려들면 이 모든 위기의 주범인 미국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게 된다. 이번 G20 정상회의는 금융 위기의 재발을 막는 것 못지않게 국경을 넘는 급격한 자본 유출입과 위기의 세계화를 고민해야 하는 자리다. 단순히 환율 합의로 넘어설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미국은 벌써부터 합의를 깨고 있지 않은가.

G20 정상회의를 사흘 앞두고 열린 G20 서울 민중회의에서는 미국이 촉발한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책임을 다른 나라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 대안으로 금융규제 강화와 투기 억제, 새로운 지역 시스템 구축 등이 논의됐다. 서울을 찾은 진보진영 씽크탱크와 현장 활동가들은 오히려 다음 G20 정상회의 의장국인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금융거래세 도입 제안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와 독일은 지난 6월 캐나다 G20 정상회의에서 금융거래세 도입에 합의한 바 있다. 금융위기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자본의 급격한 유출입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게 금융거래세의 취지다. 미국이 촉발한 서브프라임 사태의 불똥을 그대로 얻어맞은 미국 이외 다른 나라들 입장에서는 환율 전쟁 보다 훨씬 더 시급한 문제지만 우리나라는 국제적 합의를 얻기 어렵다는 이유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G20 의장국으로서 우리나라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G20 서울 정상회의는 의장국으로서 우리나라의 외교적 능력을 검증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사상 초유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선진국과 신흥국의 갈등을 중재하고 발전적 대안을 제안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떠안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하나마나한 합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천안함 사건 이후 계속해서 미국에 질질 끌려가고 있다. 미국은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유리한 조건을 압박하고 있고 이란 경제 제재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그리고 단군 이래 최대 행사라고 자화자찬하는 G20 정상회의에서 우리나라는 속절없이 미국의 ‘푸들’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이래서야 국격을 높일 수 있을까.

G20 정상회의는 대통령의 그릇을 평가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의장국으로서 우리나라가 국제 사회에 어떤 화두를 던질 것이며 어떤 대안과 합의를 도출할 것인지,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이번 G20 정상회의에서는 반드시 금융 규제 강화와 투기 억제 방안이 논의돼야 한다. 선진국과 신흥국이 공존하는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결국 잘 차려놓은 밥상을 고스란히 프랑스에 넘겨주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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