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후 2시46분. 일본 기상 관측 이래 사상 최대의 지진이 발생한 그 시각, 나는 홋카이도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로 가는 홋쿠토 특급 열차에 타고 있었다. 당초 하코다테에서 하루 더 머물 예정이었으나 일정을 바꿔 아침 일찍 도야코에 들러 점심을 먹고 기차에 올라탄 직후였다.


갑자기 쿵 하는 굉음에 열차가 멈춰서더니 정전으로 열차 운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곧 이어 열차가 거칠게 출렁거렸고 선반에 놓인 작은 가방 몇 개가 굴러 떨어졌다. 여성 승객들이 비명을 질렀고 입석 승객들은 주저앉기도 했다. 시공간이 송두리째 뒤틀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다.

동부 해안 지역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열차 운행 지연이 계속될 것 같다는 안내 방송이 이어졌다. 전광판에 진도 6 이상이라는 속보가 뜨자 승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너도 나도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곧이어 진도 8.8로 관측됐다는 속보와 함께 홋카이도 동부와 남부에도 쓰나미 경보가 발령됐다는 속보가 이어졌다.

열차는 일본의 3대 온천 가운데 하나인 노보리베쓰역을 막 지난 해안가 선로에 멈춰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창밖에 내려다 보이는 푸른 바다는 벌써부터 거칠게 출렁이는 느낌이었다. 통화가 폭증하는 듯 휴대전화는 잘 터지지 않았다. 문자 메시지도 계속해서 전송 실패로 떴다. 열차 안에는 숨막힐 듯한 공포와 긴장감이 감돌았다.

열차는 한 시간 가까이 멈춰 있다가 느린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삿포로역에 도착한 때는 오후 5시40분께. 평소 3시간10분 정도 걸리는 열차가 거의 두 배 가까이 걸린 셈이었다.

삿포로역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승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당초 일찍 도착해서 삿포로 인근의 오타루에 다녀올 계획이었으나 이미 한 시간 전에 떠났어야 할 열차들도 아직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열차를 기다리는 시민들 표정에서는 초조함과 불안감이 묻어났다.

홋카이도는 이미 지난 2003년에 진도 6의 강진을 비롯해 여러차례 크고 작은 지진을 겪은 바 있지만 이날 지진은 말 그대로 사상 최대 규모였다. 삿포로 전철도 이날 오후 세 시간 가까이 운행이 중단됐다. 호외를 받아든 시민들은 저마다 발걸음을 재촉했고 저녁 9시가 되지 삿포로 중심가는 인적이 뜸할 정도가 됐다. 텅 빈 시내 곳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긴장감을 더했다.

내가 떠나온 하코다테는 쓰나미가 들이닥쳐 해안 지역 일대가 물에 잠겼고 삿포로로 오는 열차 노선은 전면 운행 중단됐다. 도야코 역시 해안 지역 주민들에게 대피령이 내려졌다는 속보가 흘러나왔다. 홋카이도는 비교적 진앙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이곳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은 결코 덜하지 않다.

이 난리법석에 한가한 여행객이라니, 그리고 나 혼자 빠져나와 살아남았다고 안도하는 꼴이라니 민망한 일이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수몰 지역에 발이 묶일 뻔 했다. 일본 열도 전체가 지진에서 안정권이 아니며 센다이에서 일어난 끔찍한 참사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긴장감을 사람들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TV에서는 긴급 속보가 계속되고 있다. 저녁 11시께 센다이 해안 지역에서 200명 이상 사망자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전한 한 여성 앵커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한 방송사 보도국 내부를 찍은 화면에서는 캐비닛이 쓰러지고 형광등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등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이 방송사 앵커들은 헬멧을 쓰고 긴급 속보를 진행하기도 했다.

에다노 유키오 관방장관의 인터뷰가 생중계 되는 도중 진도 3의 여진이 발생했다는 속보가 뜨는 등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분위기다.

에다노 장관은 이날 저녁 인터뷰에서 “무리하게 귀가하려 하지 말고 직장 등 안전한 장소에 머물면서 대기해달라”고 당부했다. 에다노 장관은 “원자력 발전소 주변 지역 주민들을 대피 시켰지만 원전은 100%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일본 기상청은 최대 12미터의 쓰나미가 닥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추가 피해가 우려된다. 전기가 끊긴 센다이 지역은 온통 암흑 천지다. 거대한 파도가 센다이 공항 활주로를 집어삼키는 모습도 반복해서 방영되고 있다.

“지금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NHK 앵커의 탄식이 이날 저녁 일본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대변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비교적 침착하게 대처하고 있다. TV에서는 헬멧을 쓴 시민들이 질서 정연하게 대피하는 모습도 방영됐다.

이날 오후 2시46분23초 미야기현 센다이 동쪽 130km, 후쿠시마현 후쿠시마 동북동쪽 178km 지점,  깊이 24.4km 해저에서  발생한 지진은 리히터 규모 8.8로 일본 관측 사상 최대로 기록됐다. FNN에 따르면 12일 오전 0시11분 현재 공식 확인된 사망자 수는 102명.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실종자 수가 상당한데다 2차 쓰나미 등 추가 피해가 예상돼 사망자 수도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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