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광야학에서 학강들과 함께 공부하던 시절,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던 정약용의 글이다. (박지원인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정약용의 글이네.)


자식들에게 ‘물려줄 밭태기 정도도 장만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당당하다. 오히려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살라면서 그게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 보다 나은 교훈이라고 꾸짖는다. 누구나 자기 자식만큼은 여유롭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이 있겠지만 그는 음식은 ‘목숨만 이어가면 되는 것’이며 ‘하늘을 속이면 제일 나쁜 일이고, 임금이나 어버이를 속이거나 농부가 같은 농부를 속이고 상인이 동업자를 속이면 모두 죄를 짓게 되는 것이지만 단 한 가지 속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자기의 입과 입술’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생각하고 먹으면 배고픔을 잊고 가난을 이기는 방법이 된다’는 이야기다. 선비가 뒷밭에서 상추 농사를 짓는 건 생계 방편이기도 하지만 탐욕에 휘둘리지 않고 근검하게 살기 위한 의지와 노력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맨밥에 상추 몇 장을 얹은 초라한 밥상을 즐겁게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남을 속이지 말고 너의 입을 속여라, 값싼 욕망에 휩쓸리지 말아라, 그래야 진짜 선비로 살아갈 수 있다고 꾸짖는다. 이런 부모가 요즘 세상에도 있을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시골에 살면서 과수원(果樹園)이나 남새밭을 가꾸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버림받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지난번 국상(國喪)이 나 바쁜 가운데서도 만송(蔓松) 열 그루와 전나무 한두 그루를 심어 둔 적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집에 있었다면 뽕나무는 수백 그루, 접붙인 배 몇 그루, 옮겨 심은 능금나무 몇 그루 정도는 됐을 것이고, 닥나무는 지금쯤 이미 밭을 이루었을 것이다. 옻나무도 다른 밭 언덕으로 뻗어 나갔을 것이고, 석류도 여러 나무, 포도도 군데군데 줄을 타고 덩굴이 뻗어 있을 것이다. 파초도 네댓 개는 족히 가꾸었을 것이다. 불모지에는 버드나무도 대여섯 그루 심었을 거고, 유산(酉山)의 소나무도 이미 여러 자쯤 자랐을 거다. 너희는 이런 일을 하나라도 했는지 모르겠구나. 너희들이 국화를 심었다고 들었는데 국화 한 이랑은 가난한 선비의 몇 달 동안의 식량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 한낱 꽃구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생지황, 끼무릇, 천궁(川芎)과 같은 것이나 쪽나무나 꼭두서니 등에도 모두 마음을 기울여 잘 가꾸어 보도록 하여라.

남새밭 가꾸는 데는 땅을 반반하게 고르고 이랑을 바르게 하는 일이 중요하며, 흙은 가늘게 부수고 깊게 갈아 분가루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씨는 항상 고르게 뿌려야 하며, 모종은 아주 성기게 해야 한다. 아욱 한 이랑, 배추 한 이랑, 무 한 이랑씩 심어 두고 가지나 고추 등속도 마땅히 따로따로 구별하여 심어 놓고 마늘이나 파 심는 일에도 힘쓸 것이다. 미나리도 심을 만한 채소다. 또, 한여름 농사로는 참외만한 것도 없느니라.

절약하고 본 농사에 힘쓰면서 부업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이 남새밭 가꾸는 일이다.

내가 벼슬하여 너희들에게 물려줄 밭태기 정도도 장만하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자를, 마음에 지녀 잘 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이제 너희들에게 물려주겠다. 너희들은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 마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부지런함〔勤〕이란 무얼 뜻하겠는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때 할 일을 저녁때 로 미루지 말며, 맑은 날에 해야 할 일을 비 오는 날까지 끌지 말도록 하고, 비 오는 날 해야 할 일도 맑은 날까지 끌지 말아야 한다. 늙은이는 앉아서 감독하고, 어린 사람들은 직접 행동으로 어른의 감독을 실천에 옮기고, 젊은이는 힘든 일을 하고, 병이 든 사람은 집을 지키고, 부인들은 길쌈을 하느라 한밤중 [四更]이 넘도록 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 요컨대 집 안의 상하 남녀 간에 단 한 사람도 놀고 먹는 사람이 없게 하고, 또 잠깐이라도 한가롭게 보여서는 안 된다. 이런 걸 부지런함이라 한다.

검(儉)이란 무얼까? 의복이란 몸을 가리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고운 비단으로 된 옷이야 조금이라도 해지면 세상에서 볼품없는 것이 되어 버리지만, 텁텁하고 값싼 옷감으로 된 옷은 약간 해진다 해도 볼품이 없어지지 않는다. 한 벌의 옷을 만들 때 앞으로 계속 오래 입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해서 만들어야 하며, 곱고 아름답게만 만들어 빨리 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으로 옷을 만들게 되면, 당연히 곱고 아름다운 옷을 만들지 않게 되고, 투박하고 질긴 것을 고르지 않을 사람이 없게 된다.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 가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고기나 생선이라도 입 안으로 들어가면 더러운 물건이 되어 버린다. 삼키기 전에 벌써 사람들은 싫어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귀하다고 하는 것은 정성 때문이니, 전혀 속임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늘을 속이면 제일 나쁜 일이고, 임금이나 어버이를 속이거나 농부가 같은 농부를 속이고 상인이 동업자를 속이면 모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단 한 가지 속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자기의 입과 입술이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생각하여 입과 입술을 속여서 잠깐 동안만 지내고 보면 배고픔은 가셔서 주림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이러해야만 가난을 이기는 방법이 된다.

금년 여름에 내가 다산(茶山)에서 지내며 상추로 밥을 싸서 덩이를 삼키고 있을 때 구경하던 옆 사람이 “상추로 싸 먹는 것과 김치 담가 먹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답해 “그건 사람이 자기 입을 속여 먹는 방법입니다.”라고 말하여, 적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러한 생각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맛있고 기름진 음식만을 먹으려고 애써서는 결국 변소에 가서 대변 보는 일에 정력을 소비할 뿐이다. 그러한 생각은 당장의 어려운 생활 처지를 극복하는 방편만이 아니라 귀하고 부유하고 복이 많은 사람이나 선비들이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유지해 가는 방법도 된다. 근과 검, 이 두 글자 아니고는 손을 댈 곳 없는 것이니 너희들은 절대로 명심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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