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시민에게 딱히 큰 기대가 없다. 여러 차례 그에게 실망한 적이 있기 때문인데 그런데도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달마다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리는 독서토론회의 교재로 이 책이 선정됐기 때문이다. 이 책을 펼쳐들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자신에 대한 평가가 궁금했는데 의외로 유시민은 그들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구구절절 변명이 많은 느낌이긴 하지만 일단 정치인의 소통하는 글쓰기라는 데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간단히 정리해 본다. 유시민은 국가주의와 자유주의를 대비하면서 자유주의를 국가주의의 대안으로 내세운다. 국가를 계급착취의 도구로 봤던 마르크스주의는 아예 논외로 친다. 노무현과 진보진영의 불화를 의식한 듯 진보진영을 다시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 양분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집권의지가 없는 몽상적인 이론으로 평가절하한다. 혁명이 아니라 개량이 필요하다, 정치는 이상과 다르다는 게 이 책 전반에 깔린 메시지다.

토마스 홉스는 국가를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라고 봤다. 홉스는 전제군주제가 가장 이상적인 국가라고 생각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언제나 강력한 군대를 보유해야 하며 덕을 갖출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덕을 갖춘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통치 이론을 정립한 바 있다. 유시민은 이를 두고 “권력에도 유전자라는 게 있다면 국가주의는 권력의 유전자 가장 깊은 곳에 각인돼 있다”고 설명한다.

반면, 존 로크는 국가의 권력은 국민의 평화와 안전, 공공의 복지 이외의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의 의무는 공공재를 공급하는 것 뿐이라고 주장했다. 장 자크 루소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빼앗을 경우 사회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유시민은 “국가주의 국가론이 위축되면서 생기는 담론시장의 공백을 채울 유력한 담론은 자유주의 국가론 뿐”이라고 규정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유시민이 마르크스주의에 보인 냉소적인 반응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실제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거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데 기여하지 못하는 정치행위는 의미가 없다”는 등이다. “진보진영에서 한창 유행했던 ‘노명박’이라는 표현, 자유주의자와 국가주의자를 한 묶음에 넣어버리는 이 진보적 수사법의 배후에는 좌절한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 놓여있다”는 대목에서는 서운함과 배신감까지 느껴진다.

유시민은 “좌절한 마르크스주의자는 국가보안법 폐지와 남북 평화협정 체결, 비정규직 철폐, 자유무역협정 반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실시를 요구하지만 몸소 정치에 뛰어들어 그런 목표를 실현하는 일에 직접 도전하지는 않는다”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형식적 민주주의에 그쳐서는 안 되며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유시민은 너희는 말로만 떠들지 않았느냐, 우리는 직접 정치를 했다, 정치를 하려면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면서 그게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이라는 해명을 덧붙인다. 말로만 진보를 외치는 자들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결국 유시민이 말하고 싶은 건, “혁명이 아니라 개량이 필요하다”는 것. 그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유시민은 온갖 철학 이론을 끌어들이고 있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들(진보 진영)은 선거로 정부를 교체하는 문제에 관심이 적다”고까지 말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선거는 어차피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 다툼”이고 “민주주의 정치는 사회혁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오도하는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권영길을 찍으면 이회창이 대통령이 된다”고 외치던 유시민이 보기에 진보정당 지지자들은 선거로 정부를 교체하는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유시민은 이 책에서 자신을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개량의 길을 선호하는” “진보자유주의자”라고 규정한다. “타협하지 않고 정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면서 “타협없는 정치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말했던 ‘진보신자유주의’를 떠올리게 된다. 진보라는 레테르를 버리고 싶지는 않지만 진보진영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던 그들은 현실정치라는 핑계로 타협을 정당화했다.

“변질의 위험을 안고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 그것이 정치를 통해서 선을 추구하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비장한 선언이 구차한 변명으로 들리는 건 왜일까.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대중의 존경과 믿음을 얻는 길이 연합정치에 있다”면서 “연합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는 마지막 문장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유시민은 “정치학자 또는 지식인으로서가 아니라 악마성이 내재한 국가폭력과 관계를 맺고 그 폭력이 가져오는 특수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정치인으로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정치인 유시민을 가장 잘 드러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책에서 그의 바닥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어딘가 서글프다. 솔직하긴 하되 지난 날의 타협과 실패를 합리화하는 것 이상의 지향과 전망을 이 책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국가란 무엇인가 / 유시민 지음 / 돌베개 펴냄 / 1만4천원.

“대중이 부르주아 정치집단 사이의 권력투쟁에 휩쓸려 들어가고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혁명적 정치세력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교육과 언론을 모두 장악한 지배계급이 대중의 계급적 각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 “유한계급은 부유하기 때문에 혁신을 거부한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보수적이다. 혁신을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며 상당한 정신적 노력을 요구한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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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Comment

  1.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실패를 반성하라는 말은 정말 많이 하는데 그 10년 간의 성과를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은 매우 드문 것 같더군요. 보수세력은 군사독재 정권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여념이 없는데 그 반대 진영은 지난 정권을 부정하기만 하니 마치 배수진을 치고 싸우는 격이랄까요. 이것이 진보의 미덕인가요? 민주정부의 성과를 계승하는 것과 과오를 성찰하는 것은 동등하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야권연대의 성공도 여기에 달리지 않나 생각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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