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을 말하다” 릴레이 인터뷰 ⑤ 롯데손해보험 청소노동자 박근덕씨.

롯데손해보험빌딩 청소 노동자들의 노사 협상이 타결됐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지난 8일 공공서비스노동조합 서울경기지부 롯데손해보험빌딩 분회는 마지막까지 남은 노조 조합원 5명이 퇴사하는 걸 조건으로 체불 임금을 지급받기로 합의했다. 협상에서는 이겼지만 결국 노조는 해체됐고 조합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됐다. 9일 오전 마지막 출근을 위해 회사를 찾은 박근덕 분회장과 조합원들을 롯데손해보험빌딩 앞에서 만났다.

박래군 : “타결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잘 됐다 싶으면서도 이렇게 쉽게 타결될 리가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노조 조합원들이 모두 퇴사하기로 했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박근덕 : “지난해까지 75만원씩 받고 다녔다. 그러다가 올해 1월 노조를 만들고 나서 5만원이 올랐다가 다시 90만원으로 올랐다. 새벽 4시에 집에서 나와서 5시부터 일을 시작하면 오후 4시에 끝나는데 공식적인 근무시간은 오전 6시부터로 돼 있다. 직원들 출근하기 전에 청소를 끝내려면 5시부터는 일을 시작해야 하거든. 그런데 그걸 인정 안 해주더라. 그러다가 이번에 조합원들이 모두 퇴사하는 걸 조건으로 체불임금을 받기로 했다. 8개월 가까이 싸웠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 보람이 없다. 무엇보다도 노조를 못 지켜서 너무 속상하다.”

박래군 : “마지막까지 남은 조합원이 5명이라고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탈퇴한 건가.”
박근덕 : “층마다 1명씩 모두 23명이 모두 조합원이었는데 다 탈퇴하고 마지막에는 5명만 남았다. 노조를 만들었더니 계약 만료 통보가 왔더라. 출입 카드를 빼앗아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반장이 하나 하나 찾아다니면서 노조 탈퇴 각서를 받았고 사인을 하면 10만원짜리 상품권과 현금 10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때 일부는 탈퇴를 했고 12명이 남았다. 노조가 있으면 함부로 못 자르는데 다들 노조 활동을 안 해 봤으니 몰랐다.”

박래군 : “그래도 노조 덕분에 임금도 올려 받고 근무 조건도 개선된 거 아닌가.”
박근덕 :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하다가 노조를 만들고 난 뒤 휴일수당도 받게 되고 월 90만3천원까지 올려 받게 됐다. 그런데 노조 힘이 세지니까 탈퇴하게 하려고 정말 치사하게 굴더라. 다른 조합원들을 만나려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CCTV로 보고 있다가 금방 쫓아 올라왔다. 그래서 계단으로 다니면서 만났다. 2층에 휴게실이 있었는데 거기에 자주 모이니까 그것도 없애 버리더라. 파지 놓는 창고에서 모이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열쇠를 바꿔서 못 들어가게 했다.”

박래군 : “휴게실이 없으면 어디서 쉬나. 옷 갈아 입을 데는 있나.”
박근덕 : “층마다 기계실이 있는데 거기에서 잠깐씩 누워서 쉬고 밥도 거기에서 먹었다. 전기밥통을 갖다 놓고 밥을 해먹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는 밥도 모여서 못 먹게 하더라. 점심 시간에 집회를 했는데 집회를 못 하게 하려고 점심 시간을 1시부터 2시까지로 옮기기도 했다. 그래도 12시에 맞춰서 집회를 했다. 집회 끝나고 밥을 먹어도 되지만 치사해서 안 먹었다. 오기로 굶었다. 그랬더니 근무 시간에 자리를 비운다고 수당에서 그걸 까더라.”

박래군 : “그렇게 힘들게 버텼는데 왜 무너졌나.”
박근덕 : “소장하고 팀장이 집집마다 찾아가서 서너시간씩 윽박질러서 각서를 받아냈다고 하더라. 조합원 가운데 한 명이 손이 살짝 다쳤는데 무급휴직을 하라고 하더란다. 일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조합원이라고 이 참에 내보내려고 했던 거지. 얼마나 들들 볶았는지 결국 3개월 수당과 실업급여를 받게 해주는 조건으로 사표를 썼다고 하더라. 그 사람 나가고 나서 다들 지친 것 같다. 서럽고 억울하지만 5명 밖에 안 되는데 견뎌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많이 울었다.”

박래군 :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나. 일하기 힘들지는 않았나.”
박근덕 : “호적으로는 1945년생, 실제로는 1943년생이다. 만 68세다. 60대가 많고 70대도 있다. 내가 다리도 좀 불편하잖아. 그래서 계단 오르내리기가 힘들다. 여기서 일하기 전에는 서울역 앞 대우빌딩에서도 일했고 그 옆 연세빌딩에서도 일했다. 새벽 4시에 집에서 나오려면 3시 좀 넘어서 일어나야 한다. 북가좌동에서 첫 차를 타고 나오면 5시 전에 도착할 수 있다. 한 층이 500평쯤 되는데 사무실 청소하고 휴지통 비우고 하면 100리터짜리 쓰레기 봉투가 너댓개는 찬다. 화장실 변기 닦고 바닥에 커피자국 지우고 하면 오전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그렇게 고생한 게 보람이 없어서 더 억울하다.”

박래군 : “어떻게 노조를 시작하게 됐나.”
박근덕 : “전에 대우빌딩 있을 때는 노조가 잘 됐다. 여기와서는 전에 있던 실장이 주동을 해서 노조를 결성했는데 사소한 트집이 잡혀 해고됐다. 그나마 내가 노조 활동을 해보긴 했지만 뭘 얼마나 알겠나. 처음에는 두렵더라. 내가 이걸 끌고 갈 수 있을까 싶고. 그냥 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 맡게 됐는데 끝까지 잘 했다고 생각한다.”

박래군 : “뭐가 가장 힘들던가.”
박근덕 : “조합원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갈 때가 정말 힘들더라. 나는 대우빌딩에 있을 때 노조를 해봐서 좀 알지만 다들 모르니까. 자른다고 하면 다들 겁을 먹을 수밖에 없지. 5월 노동절 집회 때는 ‘비 내리는 호남선’에 가사를 바꿔서 부르는 노래가 있다. 그걸 부르고 있었더니 소장이 와서 ‘머리를 갈아버리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소장님이 갈아주세요’ 그랬다. 그런 소리 들으면서 버텨왔는데 이렇게 그만두게 되니 정말 원통하다. 용역에게 멱살을 잡힌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노조가 그렇게 큰 잘못이야? 믿고 따라준 조합원들에게도 미안하지만 그동안 우리를 돕고 응원해준 사람들에게도 미안해서 미치겠다. 학생들도 많이 도와줬는데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갚을 방법이 없다.”

박래군 : “그래도 체불임금을 인정 받은 것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박근덕 : “성공이라면 성공이겠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오전 5시부터 출근해서 일하는데 지금까지는 6시부터 근무시간으로 인정해줬다. 그걸 한 시간씩 더 일한 걸로 해서 입사일부터 지금까지 체불임금을 받게 된 건데 이번에 퇴사한 조합원들만 해당이 됐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지금 같은 조건에서 일하게 될 테니까. 그나마 노조가 있었으니 겨우 최저임금을 맞췄는데 아마 내년에는 동결되거나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수준이 되지 않을까.”

박래군 : “이제 뭘 할 건가. 다시 일을 찾을 건가.”
박근덕 : “일단은 좀 쉬고 싶은 생각인데 다시 일을 찾아야지. 아들네가 있는데 손자가 이제 대학생이라 용돈을 받을 형편이 안 된다. 일할 수 있을 때 더 일을 하고 싶은데 자리가 날지 모르겠다.”

Similar Posts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