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은 구속이냐 불구속이냐가 아니다. 검찰 또는 특검은 유죄 여부를 판단하고 기소 여부를 결정할 뿐 구체적인 양형은 법원의 몫이다. 다만 도주와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고 죄질이 나빠 높은 형량이 예상될 경우는 구속 영장을 청구할 수 있다. 애초에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고 구속 수사는 예외적이라는 이야기다.


18일 아침 일부 언론이 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구속 기소하지 않았으냐고 다분히 감정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비판의 지점은 구속이냐 불구속이냐가 아니라 주요 혐의 사실에 대해 특검이 공정하고 성실한 수사를 했느냐다. 그리고 납득할 수 있는 수사 결과를 내놓았느냐다.

특검 수사 결과 발표에서 주목할 부분은 조준웅 특검이 “법과 현실의 괴리가 있다”고 시인한 대목이다. 조 특검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재벌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둘러싼 현실적 여건과 법적 제도적 장치간의 괴리 또는 부조화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조 특검은 “개인적 탐욕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배임, 조세 포탈 범죄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조 특검은 “차명계좌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는 엄청난 범죄가 되지 않는다”면서 “이 회장의 양도소득세 포탈도 정말 탈세하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포탈하는 것과는 다른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조 특검은 “대주주가 주식을 몇 퍼센트 이상 보유할 수 없고 경영권을 방어도 해야 되니까 차명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 등 여러가지를 종합해 괴리가 있다는 표현을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탐욕에 의한 배임은 아니다? 탈세하기 위해 탈세한 건 아니다? 조 특검의 해명은 군색하기 짝이 없었다. 특검은 법과 현실이 다르다는 이유로 법적 정의보다는 현실적인 타협을 선택했다. 특검은 차명계좌의 존재를 확인했으면서도 정작 그 자금의 출처를 파헤치지 못했거나 파헤치지 않았고 불법 로비 의혹에 대해서도 관련 당사자들의 진술을 듣는 정도에 그쳤다.

삼성 특검 수사 결과와 관련된 18일 언론 보도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한겨레가 1면 머리기사에서 <90일 특검 수사 결국 ‘삼성에 면죄부’>라며 비난한 것과 달리 한국경제는 <“삼성사건, 현실과 법 괴리 때문”>이라는 조 특검의 발언을 제목으로 뽑았다. 중앙일보는 어처구니 없게도 <삼성 “쇄신안 다음주 발표”>라는 엉뚱한 제목을 내걸었다.

중앙일보는 5면에 실린 <“회사 망치는 배임과 달라 불구속”>이라는 기사와 매일경제 4면에 실린 <불구속 왜? “과거 관행적 불법 현재 잣대로 처단 곤란”>, 한국경제 3면에 실린 <“일반적인 배임·조세포탈과는 다르다”> 등도 매우 흥미롭다. 이들 신문은 조 특검의 발언을 비중있게 인용하면서 이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다.

한국경제는 “과거 대기업들이 차명으로라도 지분을 분산해 갖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을 배려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풀이”라는 기발한 해석을 내놓았다. 한국경제는 “김염상 정부 시절 등 몇 년 전만해도 대기업 총수들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명분 아래 대주주 지분을 분산하라는 정부의 강압적 정책에 따라 본인 지분율은 낮추면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임원이나 경영진 이름을 빌리는 관행적 편법을 써왔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참여연대 박원석 협동사무처장은 특검 발표 이후 기자회견을 갖고 “특검은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배임이 아니라 불구속 기소를 했다는데 그럼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룹을 물려주는 게 공적인 이익이냐”고 비판했다. 이 발언은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

사설 역시 큰 차이를 보인다.

한겨레는 “특검이 진실 앞에서 눈을 감았다”고 평가했다. 한겨레는 또 “특검도 봐주기를 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며 “이 회장 등의 범죄가 중죄라면서도 장기간 내재돼 있던 위험이니 엄격한 법의 잣대로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한겨레는 “거대 기업집단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인데도 현실을 이유로 애써 외면한다면 영영 잘못을 바로잡을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한 사람의 폭로라는 형식을 통해 부풀려졌던 의혹들을 특검이라는 절차를 통해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평가했다. 중앙일보는 “삼성의 혐의 대부분이 현실 여건과 법적·제도적 장치의 괴리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면서 “우리 기업들이 지고 왔던 역사적 부담을 삼성이 대표적으로 털고 간다는 점에서 그나마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앙일보는 이 회장 등의 범죄 사실이 삼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들의 관행적인 편법일 뿐이라며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이런 손실이 대선이라는 정치 국면과 반기업 정서 등이 얽킨 결과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면서 “이제 삼성은 특검의 짐을 버리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당부했다. 특검은 중앙일보의 위장 계열분리 의혹이 근거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지만 중앙일보는 지면을 통해 여전히 삼성 사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경제지들의 반응도 중앙일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일경제와 한국경제는 삼성의 경영 쇄신 방안을 기대한다는 거의 비슷한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매일경제는 “경제 회복에 힘을 모아야 할 때 대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면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했고 한국경제도 “더 이상 논란이 확산되는 국가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맞장구를 쳤다.

머니투데이는 1면에서 <삼성의 짐 이건희 회장이 지다>라는 제목으로 이 회장을 희생자로 묘사해 눈길을 끌었다. 머니투데이는 “시민단체를 비롯해 일부에서 나오는 특검이 삼성에 면죄부를 준 결과라는 비판과 달리 이 회장의 그룹 총수로서 일련의 사태에 대해 모든 책임을 떠맡으려 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머니투데이는 <특검 “김용철 진술 신뢰성 없었다”>, <“삼성 사태 본질은 법과 현실 괴리”>라는 등 특검의 발언을 비중있게 인용하면서 아무런 비판도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다. 5면에는 <’99일 무기력’ 삼성 이젠 힘차게 뛰자>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머니투데이는 “종업원 25만명, 연간 160조원의 매출로 국가 경제에 기여해 온 기업을 국가 전체가 죄인 취급하는 것은 한국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잘잘못을 떠나 삼성이라는 한국 대표기업이 글로벌 삼성으로 바로설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익명의 재계 관계자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머니투데이 등은 국가 전체가 삼성을 죄인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의 최대 주주 일가의 비리 의혹이 밝혀지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핵심은 국내 최대 기업 삼성이 아니라 이 회장 일가와 이들에 발목이 잡힌 경영진들이다. 머니투데이는 잘잘못을 떠나 힘을 모으자고 말하고 있지만 이번에 잘잘못을 바로 가리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비슷한 문제가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들 신문들은 지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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