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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의 알몸을 보는 방법.

나는 TV를 거의 보지 않지만 뒤늦게나마 알몸 생방송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동영상도 보았다. 시청 소감은 솔직히 재미있고 참신했다. 걔들은 벌거벗고 깡충깡충 뛰었고 변태적인 노출증이라기 보다는 우스꽝스럽고 그 이전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리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조롱하는 것처럼.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사실은 이를 둘러싼 호들갑이 오히려 더 가증스러웠다.

물론 가부장적 지배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남성이 옷을 벗는 것과 여성이 옷을 벗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최근 김인규 선생의 대법원 판결처럼 과연 남성의 아름답지 못한 벗은 모습은 외설적인 것일까. 좀더 나가면 여성의 벗은 모습은 얼마든지 상품화할 수 있지만 남성의 벗은 모습, 특히 성기 노출은 여전히 금기로 남아야 하는 것일까. 남성이든 여성이든 과연 성기는 공개적으로 노출돼서는 안되는 것일까. 도대체 왜.

흔히 바바리맨은 그런 금기를 깨뜨리는데서 쾌감을 느낀다. 금기는 아마 남성들의 기묘하게 뒤틀린 자존감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그런 금기가 거꾸로 성의 상업화를 만든다. 추한 남성은 뒤로 숨고 아름다운 여성은 상업화된다. 추한 남성은 남성들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발가벗은 여성은 그 반대다.

참고 : ‘포르노 포르나’를 보다. (이정환닷컴)

카우치의 알몸 퍼포먼스는 공개된 성 폭력이었지만 사실은 포르노가 아니기 때문에 비난 받았다. 카우치는 남성들과 이 시대의 성적 통념을 넘어서는 굉장히 낯선 폭력을 자행했다. 포르노는 용인돼도 남성의 성적 쾌감을 넘어서는, 남성들에게 수치를 불러일으키는 성 폭력은 여전히 용인되지 않는다.

타락은 여성의 몫이고 남성은 이를 소비할 뿐이다. 순결하고 존엄한 남성은 벌거벗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성 폭력은 어디에나 넘쳐나지만 카우치가 저지른 그런 성 폭력은 그래서 ‘사회적으로’ 불쾌하다. 아마도 그게 우리 시대가 편의적으로 설정한 금기의 방식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순결했던가. 선악과를 처음 따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부끄러워하는 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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