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꽤나 흘렀지만 제일은행 매각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특히 이 은행의 매각은 뒤이어 계속될 한미은행이나 외환은행 매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찌감치 첫 단추를 잘못 꿰었던 셈이다.

정부가 뉴브리지캐피털과 협상이 타결됐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1997년 9월 2일이었다. 반년이 넘도록 계속된 협상이 마침내 합의점을 찾은 것이다. 뉴브리지는 5000억원을 출자해 제일은행의 지분 51%를 확보하게 됐다. 51%의 지분은 단순한 지분 매각이 아니라 경영권이 통째로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일은행이 1999년까지는 100% 정부 소유의 은행이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는 게 좋다. 한보와 기아 부도를 겪으면서 쓰러져가던 은행을 정부가 완전 감자와 공적자금 투입으로 살려내면서 정부 소유 은행이 됐던 것이다. 정부는 1998년 3월과 199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각각 1조 5000억 원과 5조 3000억원을 투입한 것을 비롯해 모두 8조 4000억 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한 바 있다.

그렇게 엄청난 세금을 쏟아부어가며 살려낸 은행의 경영권을 단돈 5000억 원에 그것도 외국계 펀드에 넘겨버린 것이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뉴브리지 이전에 제일은행에 욕심을 냈던 HSBC(홍콩상하이은행)는 지분 70% 이상을 사들이겠다고 고집했다. 그때만 해도 정부는 49% 이상의 지분을 확보해야겠다는 입장이었고 결국 51%만 사겠다고 한발 물러선 뉴브리지의 손을 들어줬다. 문제는 뉴브리지가 내놓겠다는 돈이 단돈 5000억 원밖에 안 됐다는 것이다. 5000억원에 지분 51%를 팔기 위해 정부는 대규모 유상감자와 액면병합까지 해야 했다. 뉴브리지가 싸게 살 수 있도록 자본금을 4조 4806억 원에서 9806억 원으로 줄인 것이다.

뉴브리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미국계 사모펀드인 텍사스퍼시픽그룹(TPG)과 블럼캐피털이 아시아 지역 투자를 위해 1994년 설립했다는 것. 두 펀드가 각각 70%, 30%의 지분을 갖고 있다. 데이비드 본더만 TPG 회장과 블럼캐피탈의 리처드 블럼 회장이 공동회장을 맡고 있다. TPG는 주로 금융, IT, 소비재 산업에 투자한다. 버거킹, 델몬트, 재팬텔레콤 등의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투자회사가 과연 금융기관의 대주주가 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뉴브리지는 금융기관도 금융지주회사도 아니었다. 그런데 제일은행이 부실금융기관이라는 이유로 금융기관의 대주주가 될 자격이 없는 외국계 투자회사에 정부 소유의 은행을 넘긴 것이다. 뉴브리지는 은행법 시행령의 예외 조항을 적용해 사모펀드에게 은행을 넘긴 첫 번째 사례였다.

게다가 정부는 뉴브리지에 풋백 옵션까지 제공한 것으로 뒤늦게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 매각 이후 3년 동안 발생하는 모든 부실 여신에 대해 정부가 손실을 보전해 주기로 한 것이다. 뉴브리지로서는 그야말로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조건이었던 셈이다. 정부는 매각 이후에도 그렇게 6조 6780억 원을 더 집어넣어야 했다. 그때만 해도 이런 풋백 옵션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터무니없이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헐값 매각에 대한 논란도 없었다.

정부와 뉴브리지가 드래그 얼롱 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드래그 얼롱이란 최대주주가 일정 지분 이상을 매각할 때 매입자가 요구할 경우 2대나 3대 주주까지 동일한 조건으로 팔아야 하는 계약을 말한다. 제일은행의 경우 51%의 지분을 보유한 뉴브리지가 지분을 30% 이상 매각할 경우 49%를 보유한 정부도 같은 조건에 주식을 내다팔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2000년 1월 뉴브리지는 이미 제일은행의 지분 100%를 내다팔 수 있는 권리를 얻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실이 2004년 10월 공적자금관리위원회가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 업무 보고를 하기까지 4년 가까이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가 이면 계약을 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정부 관계자는 비밀유지 계약에 따라 공개하지 않았을 뿐 이면 계약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정부의 설명은 이렇다. 드래그 얼롱은 국제 인수합병 시장의 관행으로 주식을 사들이는 쪽에서는 나중에 유리한 가격에 되팔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정부는 드래그 얼롱 뿐만 아니라 태그 얼롱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태그 얼롱은 드래그 얼롱의 반대 개념으로 최대주주가 주식을 팔 때 2대나 3대 주주가 자신들의 보유 지분도 동일한 조건으로 함께 팔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돌아보면 뉴브리지가 들어오던 무렵 제일은행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1998년 12월 말 기준으로 485억 원이던 자기자본이 1999년 6월에는 마이너스 1조5000억 원까지 줄어들었다. 신규 대출은 모두 중단됐고 기존 여신은 종전 한도 안에서만 만기 연장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부도 직전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정부는 1999년 6월 제일은행에 5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이미 1998년 3월에도 1조 5000억 원의 공적자금을 쏟아 부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사라진 뒤였다. 정부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장 제일은행이 문을 닫으면 18조 2000억 원에 이르는 여신을 모두 회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수가 어려운 고정이하 무수익여신이 3조 8323억원, 전체 여신의 20%가 넘었다.

그 무렵 제일은행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정부는 그래서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쏟아 부었다. 문제는 그렇게 가까스로 살려놓은 은행을 고스란히 외국계 펀드에 넘겨줬다는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 과정에서 뉴브리지의 대주주 적격성 심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 관료들은 외자 유치와 경영권 매각의 차이를 알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무시했고 사모펀드가 은행의 대주주가 된다는 것의 의미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제일은행이 살아난 것은 뉴브리지가 경영을 잘 했기 때문일까. 뉴브리지에 넘어간 5년 뒤 2004년 9월 기준으로 제일은행은 852억원의 당기순익을 냈다. 자기자본이익률도 6.61%까지 뛰어올랐고 29.9%에 이르던 무수익여신은 1.40%로 줄어들었다. 자산규모는 30조 9338억 원에서 47조 723억 원으로, 여신 규모는 15조 3222억 원에서 31조 391억 원으로 2배 이상 늘어났다.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먼저 1999년 이후 정부가 제일은행에 투입한 공적자금이 무려 17조 6532억 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뉴브리지에 넘어갈 무렵 제일은행이 이미 정상화된 상태였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심지어 정부는 매각 이후에도 풋백 옵션까지 주면서 제일은행의 부실을 모두 떠안지 않았던가.

또한 뉴브리지로 넘어간 뒤 기업대출이 줄어들고 가계대출이 크게 늘어난 것도 눈에 띈다. 1999년만 해도 기업대출이 11조454억원, 가계대출이 1조7298억원으로 기업과 가계 비율이 7대 1 정도였는데 이게 2004년 9월로 오면 12조5401억원과 18조4750억원, 4 대 6으로 역전된다. 그나마 가계대출도 철저하게 주택담보 대출이나 숙박·음식업에 집중됐다. SK네트웍스(옛 SK글로벌) 등 제일은행과 거래해온 기업들은 주거래은행을 다른 은행으로 바꿔야 했다.

제일은행은 또 대부분 금융기관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출자전환에 참여했던 LG카드 사태나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 때도 발을 뺐다. 은행 입장에서는 수익과 안정성을 고려한 전략이었겠지만 은행의 공공성이나 사회적 책임을 저버렸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제일은행은 결국 2005년 1월 스탠더드챠터드은행(SCB)에 다시 팔려나갔다. SCB는 드래그 얼롱 계약에 따라 뉴브리지 지분 뿐만 아니라 나머지 정부 지분까지 모두 사들여 100%의 지분을 확보했다. 인수 가격은 주당 1만 6511원, 모두 3조 4000억 원이었다. 뉴브리지는 1조6510억원을 벌어 들였다. 5000억 원을 투자했으니 시세차익은 1조1510억원, 5년 만에 두배 이상을 남긴 셈이다. 49% 이상 지분을 확보하겠다던 정부는 5년 만에 꼼짝없이 지분을 모두 내줘야 했다.

물론 정부도 나머지 지분을 팔아 1조 7500억 원을 벌어들였다. 결코 싸게 판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쏟아 부은 엄청난 공적자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죽 쒀서 개 준 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제일은행에 들어간 공적자금은 모두 17조 6532억 원, 정부는 그 가운데 유상감자와 부실자산 매각 등으로 12조 3000억 원을 회수했다. 결국 5조 3532억 원의 손해를 본 셈이다.

제일은행 매각에 대한 평가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예금보험공사는 논란이 확산되자 만약 제일은행을 청산했으면 국민 부담이 18조 5000억 원에 이를 것이라는 자료를 내놓기도 했다. 예금보험공사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부실금융기관의 공적자금 회수율이 61.3%에 이른다. 굳이 따지자면 제일은행의 공적자금 회수율은 69.7%로 이보다 더 높다. 제일은행의 매각 또는 청산은 IMF 권고 사항이기도 했다. 정부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뉴브리지는 1조 1510억 원을 벌어들이고도 세금 한푼 내지 않았다. 뉴브리지는 말레이시아의 라부안에 KFB뉴브리지홀딩스라는 자회사를 두고 있는데 이 회사가 제일은행의 실질적인 대주주였다. 우리나라와 말레이시아는 이중과세 금지협약을 맺고 있어 본점 소재지 과세원칙에 따라 뉴브리지는 우리나라에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 그런데 라부안은 조세회피지역이라 뉴브리지는 말레이시아에도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뉴브리지는 조세회피 등의 논란이 확산되자 2005년 4월, 자산관리공사와 중소기업연구원에 각각 1000만 달러씩, 모두 2000만 달러를 사회공헌기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생색은 잔뜩 냈지만 전체 수익의 2%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사회공헌기금 기증식에 참석한 리처드 블룸 뉴브리지 회장은 조세회피 의혹을 단호하게 반박했다. “우리는 세금을 회피하고 있지 않다. 한국과 미국의 과세협약은 이중과세 방지협약이다. 한미 양국에 이중으로 세금 내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세금은 과세협약에 따라 내는 것이고 그 이상의 세금을 내지 않을 것이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안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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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1. 1.뉴브리지에 대한 대주주 적격성 심사는 있었고, 부적격자이었으나 예외적으로 인정해 주었다는 보도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2.국민의 혈세 투입부분과 뉴브리지 매각가격에는 관련이 없다. 풋백부분까지 감안하여 액면가로 매각한 것이 정당한 가격이었느냐의 문제다.
    3.뉴브리지는 4년만에 투입된 돈의 2배를 벌었다. 하지만 우리는 ’97년말 뉴브리자 제일은행을 입질할 때 우리나라 한전 전환사채 세후수익률이 년 25%였다. 3년이면 1배번다는 얘기다. 한빛은행 투자했던 코메르즈 1조 날렸다. 꼭 버는 넘만 있는 것은 아니다.
    4.파나마, 바하마, 말레이등 조세회피지역을 이용하여 회사설립하는 것는 국제금융의 상식이다. 우리나라 배들이 파나마 국기꽂고 다닌다. 조세회피하기 위해서다.

    결론적으로 이전환님의 글은 사실의 정보를 바탕으로정서적인 면의 분석에 많이 치우쳐 있다. 애독자로서 예리한 논리와 분석을 더 바란다.

  2. 1.뉴브리지에 대한 대주주 적격성 심사는 있었고, 부적격자이었으나 예외적으로 인정해 주었다는 보도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2.국민의 혈세 투입부분과 뉴브리지 매각가격에는 관련이 없다. 뉴브리지가 본전 말아 먹을 위험, 풋백부분까지 감안하여 액면가로 매각한 것이 정당한 가격이었느냐의 문제다.
    3.뉴브리지는 4년만에 투입된 돈의 2배를 벌었다. 하지만 우리는 ’97년말 뉴브리자 제일은행을 입질할 때 우리나라 한전 전환사채 세후수익률이 년 25%였다. 3년이면 1배번다는 얘기다. 한빛은행 투자했던 코메르즈 1조 날렸다. 꼭 버는 넘만 있는 것은 아니다.
    4.파나마, 바하마, 말레이등 조세회피지역을 이용하여 회사설립하는 것는 국제금융의 상식이다. 세금 덜 낼려고 우리나라 배들이 파나마 국기꽂고 다닌다.

    결론적으로 이전환님의 글은 사실의 정보를 바탕으로정서적인 면의 분석에 많이 치우쳐 있다. 애독자로서 예리한 논리와 분석을 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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