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이 26일 기업환경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우리나라는 178개국 가운데 30위에 올랐다. 1위는 싱가포르, 2위는 뉴질랜드, 3위는 미국이다. 국내 언론에서는 연합뉴스가 가장 먼저 이를 보도했고 대부분의 언론이 이를 받아썼다. 28일 아침 주요 일간지에 실린 관련 기사는 통계로 장난을 치는 고질적인 왜곡보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조사결과는 선진국이 상대적으로 기업 활동이 자유롭고 개발도상국은 제약이 많다는 걸 보여준다. 이 조사를 주관한 세계은행 산하 IFC(국제금융공사)는 개발도상국 민간기업에게 융자를 해주는 국제단체다. 순위 자체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개발도상국의 규제개혁과 미국식 자본주의의 확산이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은행이 공개한 기업환경 지도를 보자. 녹색 표시는 기업 활동을 하기에 좋은 나라, 노란색은 중간, 빨간색은 문제가 많은 나라다. 별표가 붙은 곳은 규제개혁에 성과를 보이고 있는 나라다. IFC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이미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 포함돼 있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지표를 들여다보면 순위가 높다고 해서 최선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어느 정도 상위권에 속하면 순위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20위가 30위보다 더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번 조사는 창업과 폐업, 고용, 세금, 인허가, 소유권 등기, 투자자보호 등 10개 분야에 걸쳐 순위를 매기고 이를 다시 평균을 내는 방법으로 순위를 정했다. 우리나라는 창업 분야에서 110위, 고용에서 131위, 세금에서 106위를 기록해 평균 점수를 크게 깎아 먹었다. 소유권 등기와 투자자 보호에서도 각각 68위와 64위로 낮은 점수를 받았다.
세부적으로 항목을 살펴보면 이해가 쉽다.
창업 분야에서는 창업비용 항목이 163위를 기록했다. 우리나라에서 법인설립에 필요한 최소 자본금이 5천만원인데 1인당 국민소득 대비 비율로 치면 296%로 OECD 평균 32.5%보다 훨씬 높다. 창업 분야에서 신고절차나 신고비용 등의 항목은 다른 선진국 대비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고용 분야에서는 해고 비용이 점수를 많이 깎아 먹었다. 20년 종사한 노동자의 경우 86.7주 분량의 임금(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 퇴직금 제도가 없는 나라들과 비교하면 비용 부담이 큰 건 사실이다.
세금 분야에서는 납입회수와 사무처리에 드는 시간이 점수를 많이 깎아 먹었다. 납입회수는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이 각각 한 달에 한 번씩, 여기에 법인세와 부가가치세, 산재보험 등을 포함해 모두 48번이나 됐다. 사무처리에 드는 시간도 290시간이나 됐다. OECD 평균은 15.1번과 183.3시간이다.
규제 개혁 한 목소리… 의미없는 순위 경쟁.
28일 아침 주요 언론의 보도를 보면 한 목소리로 규제 개혁을 외치고 있다. 대부분 언론이 우리나라의 기업 환경이 추락했다는데 방점을 찍고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더니 이게 뭐냐는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 여당을 직접 겨냥한 비판도 많다.
매일경제는 “태국(15위), 말레이시아(24위) 같은 동남아 개도국, 에스토니아(17위), 그루지아(18위) 같은 옛 소련 국가만도 못한 것으로 평가됐다”고 쓴 소리를 했다. 매경은 “기업 환경이 나빠질수록 국내 기업은 국외로 떠나고 한국에 투자하려는 외국 기업들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면서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가 위기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매경의 결론은 “정부는 더 늦기 전에 전면적이고도 근본적인 규제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경은 “말뿐인 규제 개선이 아니라 혁명적인 사고 전환을 통해 기업 천국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른 신문들도 논조는 비슷하다.
경향신문은 27일 16면 <한국 기업하기 좋은 나라 7단계 추락>에서 “지난 1년간 창업 여건과 노동시장 환경이 크게 나빠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조금만 세계은행 자료를 자세히 들여다봤으면 지난해와 비교해서 달라진 건 하나도 없고 다만 순위가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다른 나라들도 규제개혁 없이 순위만 바뀐 경우가 많다.
국민일보는 27일 <한국 기업환경 뒷걸음>이라는 기사를 내보낸데 이어 28일에는 사설에서 “기업은 5년 뒤 먹고 살 거리를 찾아 헤매고 있는데 정부는 말로만 1인당 국내총생산 3만달러 달성을 외치고 있다”면서 “기업환경 개선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내놓으라”고 주문했다. 비분강개한 어조였지만 정작 기업환경이 어떻게 문제인지는 지적하지 못했다.
국민일보는 고용분야 순위가 131위로 “작년에 이어 바닥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태백, 사오정 등의 자조적 용어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러나 세계은행의 고용분야 순위는 취업률이나 실업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야간 근무나 휴일 근무에 법적으로 제약을 두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면 점수가 깎이는 방식이다. 주 5일 근무를 법적으로 못박아둬도 점수가 깎이고 연월차 일수가 많아도 점수가 깎인다. 앞서 잠깐 살펴봤던 것처럼 고용분야에서는 특히 해고비용 항목이 점수를 많이 깎아 먹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해마다 적립해야 하는 퇴직금은 해고비용으로 보기 어렵다. 퇴직금을 해고비용에 포함시켜 고용 유연성이 낮다고 평가하는 건 옳지 않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지적하는 언론은 한 군데도 없었다. 이태백이니 사오정이니 잠꼬대 같은 소리만 하고 있을 뿐이다.
어처구니 없는 분석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동아일보는 27일 8면에 <공장 인허가 비용, OECD 평균의 2배>라는 제목을 뽑았다. 공장과 설비 인허가 비용이 1인당 소득의 170.2%로 OECD 회원국 평균(62.2%)의 두 배가 넘는다는 이야기인데 7억원짜리 공장을 짓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인허가 비용이 2374만원, 싱가포르에서는 3080만원짜리 공장을 짓는데 723만원이 든다. 미국에서는 2억5천만원짜리 공장을 짓는데 371만원이 든다. 애초에 일괄적으로 비교하기에 무리가 따르는데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나라에는 전기와 수도 설비비가 1천만원 이상 잡혀 있는데 미국에는 전혀 잡혀 있지 않다는 것도 애매하다.
동아일보는 28일 사설에서 “이처럼 기업할 환경이 나빠졌으니 국내총생산(GDP) 순위가 세계 11위에서 13위로 떨어질 만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외자가 한국을 외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내 자본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중요한 이유들”이라고도 지적했다.
어떤 규제를 얼마나 더 완화할까.
기업들이 돈 1천만원이 아까워서 외국으로 빠져나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외자나 국내 자본이 외면하지 않게 하려면 어떤 규제를 얼마나 더 완화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없다. 국민연금을 1년에 한번 몰아서 내지 않고 12번에 걸쳐 나눠 내는 것이 과잉규제일까. 세금을 1년에 48번이나 내는 나라라고 비난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비판일까.
세계일보는 28일 사설에서 <이런 기업 환경으로 선진국 가능한가>라고 통탄해 마지않았다. 세계일보는 “규제완화를 공격적으로 해야 선진국으로 빨리 갈 수 있다”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조선일보의 왜곡과 과장도 돋보인다. 조선일보는 “포르투갈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유효한 개혁을 가장 많이 한 반면 한국은 기업 경영 환경을 낫게 하는 개혁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다른 신문들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일보의 보도는 특히 문제가 많다. 세계은행은 규제개혁에 성공한 나라들로 이집트와 크로아티아, 가나, 마케도니아, 콜롬비아, 중국 등 10개 나라를 꼽았다. 개발도상국에 갖다 댈 잣대를 우리나라에 갖다 대는 것도 우습지만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선진국들도 모두 지난 1년 동안 규제개혁 사례가 한건도 보고된 바 없다는 사실을 일부러 빠뜨렸을 가능성이 크다. 포르투갈이 개혁을 가장 많이 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파이낸셜뉴스는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 따라잡힐지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한국경제는 미국 델라웨이를 사례로 거론하면서 “세금과 규제가 적어 기업들이 몰려든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지적했듯이 세계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들의 수익대비 세금 비율은 34.9%로 OECD 평균 46.2%보다 낮다.
독자들이 영어를 읽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어차피 외국 자료고 찾아볼 사람도 없을 테니 적당히 한번 인용하고 입맛대로 해석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우리나라 노동 유연성 이미 세계적 수준.
보수성향의 일간지와 경제지들은 그동안 줄기차게 규제완화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해 왔다. 이들의 주장의 핵심은 간단히 노동 유연성을 확보하고 세금을 깎아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세계은행 자료는 이들의 주장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노동 유연성은 우리도 세계적인 수준이고 가뜩이나 이번 조사에는 비정규직이 전혀 고려돼 있지 않다. 세금 역시 OECD 평균 보다 낮다.
오히려 이번 조사에서 투자자 보호 분야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된 항목들은 국내 언론이 그동안 강조해온 기업하기 좋은 환경과는 배치되는 부분도 많다. 대주주의 영향력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또는 주주들이 이사회 의장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등의 항목에서 우리나라는 낮은 점수를 받았고 전체 순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은행은 공시를 강화하고 내부자 거래를 엄격히 처벌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세계은행은 주식 투자자의 입장에서 주권의 위임을 전제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고민하고 있는 반면 국내 언론은 철저하게 재벌 대기업 일가의 입장에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부르짖어 왔다. 출자총액제한제도의 폐지나 금산분리 완화 등은 철저하게 재벌 대기업 특히 삼성그룹의 이해를 대변하는 주장들이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꿈꾸는가.
아울러 마지막으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실체를 명확히 짚고 넘어갈 필요도 있다. 민감한 부분은 결국 고용과 세금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1위를 한 싱가포르의 경우 야간 근무나 휴일 근무를 시키는데 아무런 법적 제약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4주일분 임금을 챙겨주면 언제라도 해고가 가능하다. 최저임금제도 없고 고용과 해고 임금 등에 대해 아무런 법적 제약이 없다. 세금은 OECD의 절반 수준이다.
기업이 말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결국 더 쉽게 해고하고 노동 비용을 더 낮추고 세금도 적게 내는 환경을 말한다. 그동안 언론은 경제 성장을 명분으로 기업의 이해를 막연히 대변해 왔다. 이번 세계은행 관련 보도는 언론의 무분별한 기업편향과 왜곡보도의 답답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나라 언론들, 무식하거나 악랄하거나…
이런 반박을 처음 보는게 아니라서 가슴이 아프군요
노무현 정부 초기에도 그 이전에도
이 순위를 들먹이며 나라를 압박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때도 예외없이 이런 반박이 나왔지만
언론이 이걸 되짚어 보는 일 따위는 없었지요.. 반복에 반복이지만 별로 달라지는 건 없군요..
까놓고 말해서 순위를 깎아먹은 해고나 고용안정비용은 관심도 없으니
무조건 규제를 풀고 노동시간을 늘여서
자본이 많은 대기업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라 이런거겠죠.
장사하다 망해도 자본가졌던 사람은
소위 애들 말로 ‘먹튀(먹고 튀자)’ 하면 그만이고
그 피해를 입는 노동자는 항의하다 법적으로 처벌받으면 그만이고 -.-
이런 논리를 대체 몇십년간 우려먹는 건지.
불합리의 정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상당히 공감가는 글입니다. 허접한 기자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왜 이런걸 못쓸까요..쩝.
제가 지금 싱가폴에 있는데 기업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한국보다 쉬워보이기는 합니다만, 글쎄요.. 왠지 여기서 부유한 것은 정부와 대기업들 뿐일꺼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좀 핀트가 안맞는 답글이네요.
찌라시 공장이 선동의 기구에 지나지 않은 줄은 알고 있지만 꼼꼼히 까발려 주시니 무척 도움이 됩니다.
찌라시 언론들의 반복되는 낚시질이죠~
낚시질도 하려면 좀 새로운 걸 해야 낚여줄 맛도 나지~ 이건머 맨날 똑같은 이야기들이니…
네이버를 개이버라 칭하고 까주면 블로그 방문자 수가 늘어나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해야할까요?
동아는 그렇다 치고, 경향같은곳은 기자가 전문성이 떨어지는건가요? 아니면 참여정부가 모든 언론의 적이 된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