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다가 닮는다. 론스타를 비판하더니 이제는 론스타가 되고 싶어 한다.

재정경제부가 사모펀드의 해외 인수합병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기로 했다. 이르면 내년부터 사모펀드가 해외에서 부실채권에 투자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조세회피 지역을 경유하는 다단계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할 수도 있게 되고 국내 기업의 해외 사모펀드 투자는 출자총액제한제도에서 예외로 하기로 했다. 금융 및 세제 지원도 확대할 계획이다.


19일 아침 주요 언론의 반응은 환영 일색이다. 우리도 론스타처럼 공격적인 인수합병에 나서고 세금 한 푼 내지 않을 수 있다는데 일부 언론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동아일보는 “국내 PEF들도 론스타 등 외국계 PEF들처럼 조세회피지역을 경유하는 다단계 SPC를 통해 세금을 절감하고 부채비율을 극대화하는 것 등이 가능해진다”고 설명했다. 국민일보는 “재벌그룹의 해외 M&A가 한층 손쉬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모펀드(PEF, Private Equity Fund)는 돈의 출신 성분을 묻지 않고 공개하지도 않는다. 비공개로 투자자를 모집해 저평가된 기업의 지분을 사들이고 기업 가치를 높인 다음 되파는 방식으로 이익을 낸다. 통상 운용자산의 2%와 운용수익의 20%를 수수료로 받는다. 헤지펀드와 차이라면 사모펀드는 경영권에 관심이 많고 상대적으로 투자기간이 길다. 헤지펀드는 상대적으로 투기적 성격이 더 강하다.

매일경제가 주최한 세계지식포럼에서 18일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은 “칼라일 등 대형 사모펀드의 사업 구조를 들여다보면 일반적인 자산 운용사와 다른 점이 없다”며 “몇 년 뒤에는 헤지펀드와 사모펀드의 구분이 없어지고 대체투자자본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일 것”으로 전망했다.

김병주 회장은 한미은행을 인수했다가 씨티은행에 넘겼던 칼라일아시아의 전 회장이다. 칼라일그룹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사위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칼라일의 한미은행 인수과정에서 박 전 총리를 비롯해 이헌재 당시 금감원장과 재경부 이종구 금융정책국장 등을 상대로 광범위한 로비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국내 자본을 모아 한국판 칼라일을 표방하고 만든 사모펀드가 MBK파트너스다. 김 회장은 한미은행 헐값 매각의 주역이지만 한 번도 금융감독원이나 검찰 조사를 받은 바 없다.

국내 언론은 그동안 론스타와 칼라일의 ‘먹튀’를 비난해 왔지만 국내 자본과 외국 자본이라는 단순한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론스타가 문제됐던 건 외국 자본이 세금 한푼 내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금융기관의 대주주가 될 자격이 없는 사모펀드가 은행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은행의 공공성을 단기 이익 극대화의 수단으로 악용, 엄청난 시세차익을 올리고 빠져 나가는데 대한 문제제기는 정작 없었다. 우리도 한국판 론스타, 한국판 칼라일을 만들자는 어처구니 없는 발상은 그래서 나온다. 외국 자본이 들어와서 하면 ‘투기’ 자본, 우리가 나가서 하면 해외 ‘투자’라는 이상한 자기 합리화다.

경향신문은 “대기업의 풍부한 자금을 활용해 우리나라도 해외 인수합병 시장에서 론스타처럼 ‘큰손’으로 통할 수 있는 대형 토종 PEF를 적극 육성하겠다는 취지”라고 해석했다. 경향은 다만 “대기업의 자금이 해외 M&A 시장으로 급격하게 유출될 경우 국내 투자가 급감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 또한 나온다”고 지적했다.

한겨레는 관련 기사를 아예 내보내지 않았다.

서울경제는 “국내 PEF의 역외투자만 규제를 완화해 ‘반쪽짜리’라는 평도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시장을 마음놓고 헤집고 다니는 해외 PEF와 달리 국내 PEF의 국내 투자는 여전히 규제에 묶여 있다”고 불만을 늘어놓기도 했다.

이를테면 삼성이나 LG 등 국내 재벌 대기업이 PEF를 통해 국내 기업을 인수합병하는 것까지 허용해달라는 이야기다. 약방에 감초처럼 역차별 논란도 나온다. 건져 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랄까. 매일경제와 한국경제도 내친 김에 좀 더 적극적인 규제완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매일경제는 “이 같은 조치가 진작 나왔어야 한다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높다”고 지적했다. 매경은 업계 관계자의 말을 인용, “정부가 진정 M&A 시장의 활성화를 원한다면 모든 규제를 다 풀어주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이제라도 부실채권 인수 길을 터준 것은 고맙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한 발 늦은’ 그리고 ‘공식적인’ 조치일 뿐이며 할 만한 곳은 알아서 자기자본 형태로 진출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경제는 사설에서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해외 M&A 자금에 대한 임시투자세액공제 등 당장 재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책들이 빠져 실효성에 의문이 든다”는 것. 그리고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데다 리스크가 높은만큼 정부가 규제철폐와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매경과 한경은 철저하게 자본의 이해를 대변한다. 자본은 이제 국경을 넘고 제도와 규제를 초월한다. 미국 텍사스주에 본사를 둔 론스타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나 세계 어느 나라 정부에도 세금을 내지 않는다. 주목할 부분은 이들 경제지들이 자본의 이해를 강조할 때는 국내 자본이냐 외국 자본이냐의 프레임도 기꺼이 내던진다는 사실이다.

자본의 자유화라는 큰 틀에서 매경과 한경은 결국 론스타나 칼라일과 연대하고 있는 셈이다. 규제 완화를 밀어붙이고 있는 재경부 관계자들도 마찬가지다. 세계 경제는 이미 금융자본의 강력한 연대에 종속돼 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세계적인 흐름이지만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그 흐름을 추종한다는 것은 정말 아찔한 일이다.

자본의 이해가 정부와 언론을 규율하는 시대가 됐다.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가 확산되면 이익의 편중과 양극화는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자본의 연대 만큼이나 민중의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대안은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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