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의 불법 비자금 조성 의혹에 침묵해 왔던 경제지들이 특별검사 도입을 앞두고 삼성 그룹의 경영 차질을 우려하고 있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내용을 사회면 단신으로 축소 보도했던 경제지들이 삼성의 해명이나 특검 도입을 반대한다는 경제 5단체의 성명을 1면에 내보내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한국경제는 19일 1면 <삼성 "투자 실기(失機)가 더 무섭다">에서 “삼성 그룹이 내년도 신규 투자계획을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면서 “재계는 삼성의 대외 신인도 하락과 해외 거래선 동요도 걱정이지만 투자 실기로 인해 후발주자들에게 추월당할까 크게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경은 “그룹 전략기획실이 비자금 사태 대응에 매달리고 있고 각 계열사 최고경영자들은 해외 거래선 및 투자자들의 동요를 진화하는데 전력하고 있어 내년도 투자계획에 손도 못 대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경은 이어 5면 전면을 털어 삼성그룹의 경영 차질 우려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거래선 "단가 깎자"… 투자자 "경영차질 없나">에서는 “경영차질이 당초 걱정했던 우려 수준을 넘어 현실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의혹 제기 이후 삼성전자의 일부 해외 거래선은 제품 단가를 낮춰달라는 무언의 요구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며 “내년 사업에 정말 차질은 없겠느냐는 문의가 빗발친다”고도 전했다.
그러나 삼성이 내년도 투자 계획에 손을 못 대고 있다는 건 터무니없는 엄살이다. 경영진의 불법행위 연루 의혹 때문에 투자 계획을 방치하고 있다면 이는 배임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경은 애꿎은 특검 탓을 하고 있다. 한경은 경제 5단체의 성명을 크게 인용보도 했고 사설과 칼럼을 동원, 삼성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동아일보도 19일 B4면 <삼성, 내년 초 경영공백 우려>에서 삼성그룹 고위 임원의 말을 인용, “그룹 전략기획실이 김 변호사의 폭로 사태 이후 특검 법안 등 외부의 정치 공세에 대응하느라 해야 할 본연의 일을 못하고 있다”며 “내년 초까지 일시적인 경영 공백까지 우려된다”고 전했다.
동아일보는 17일 8면 <경제 5단체 "특검, 정치적 이용 우려… 기업 신인도에 타격">에서는 이들 단체의 말을 인용, “진위가 불분명한 이번 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의 확산이 해당 기업은 물론 경제와 사회 전반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경제와 사회 전반을 볼모로 특검과 정치권을 압박하고 있는 셈이다.
서울경제 는 16일 2면 <"경영차질 우려되고 안타깝다">에서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말을 인용, “(해외 비즈니스 파트너들이) 삼성이 그동안 잘해왔는데 경영이 위축되는 건 아니냐고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 전했다. 윤 부회장은 “경쟁력 강화에 주력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런 일이 생겨서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의 인터뷰 원문을 보면 윤 부회장은 이날 “경영 차질이 우려된다”고 직접 말하지 않았다. 다만 해외 거래처들이 걱정을 한다고 전했을 뿐이다. 그런데 서울경제는 윤 부회장이 경영 차질이 우려된다고 말한 것처럼 제목을 뽑았다.
윤 부회장은 김 변호사의 폭로와 관련해서도 “(삼성이) 절대 그랬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확실한 부인도 아니고 잘 모르겠다는, 삼성그룹의 핵심 임원의 답변이라고 하기에는 애매모호하고 무책임한 답변이었다. 그런데 서울경제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회사를 곤경에 빠뜨려도 되느냐”는 발언을 작은 제목으로 뽑았다.
매일경제는 16일 1면 <바이어 문의 쇄도/삼성, 해명에 진땀>에서 “당장 내년 사업계획 마무리 작업이 지연되고 있고 5~10년 후 신수종 사업 찾기도 비자금 특검이라는 뜻하지 않는 암초를 만나 차질을 빚고 있다”고 전했다. 한 대학교수의 말을 인용, “특검이 이뤄지면 사실상 1년 내내 그룹 경영진이 수사를 받게 되는 것인데 이는 그동안 경영활동을 접으라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 변호사의 첫 폭로 후 20일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5~10년 후 신수종 사업 찾기가 차질을 빚고 있다거나 경영활동을 접으라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는 지적은 터무니 없는 엄살이다. 이들 경제지들은 삼성의 비자금 의혹을 상당부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의혹을 파헤치기 보다는 경영 차질이 우려된다는 삼성의 엄살을 확대 재생산 하고 있다.
경제지들은 과거 X파일 사태나 현대 비자금 사태 때도 비슷한 논리로 정치권과 검찰을 압박해 왔다. 경영차질을 빚게 된 근본 원인을 외면하고 드러난 의혹을 무조건 덮고 가자는 이야기다.
삼성 전략기획실 관계자는 19일 미디어오늘과 전화 통화에서 “당장 생산과 판매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지만 향후 거래처들과 단가와 물량을 계약하는 과정에서 최근 상황을 네고 포인트로 삼을 가능성은 있다”고 지적했다. 사업계획 차질과 관련해서는 “주관부서가 따로 있어 진행을 하고 있지만 최종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최근 상황이 전혀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경영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고 경영공백까지 말하는 건 과장된 것 같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