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화 약세가 본격화하면서 달러화 자산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몇 가지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첫 번째는 슈퍼모델 지젤 번천이 최근 신규 계약을 체결하면서 모델료를 유료화로 달라고 요구했다는 소식이다. 달러화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고 있어 앉은 자리에서 고스란히 손해를 본다는 이유에서다.


두 번째는 인도 문화부가 타지마할을 비롯해 주요 유적지의 입장료를 루피화로 받겠다고 선언한 소식이다. 최근까지 타지마할의 입장료는 5달러였는데 환율이 1달러당 50루피에서 39루피까지 떨어지면서 루피화 환산 매출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전한 파이낸셜타임즈는 달러화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고 평가했다.

좀 더 심각한 징후는 산유국들의 움직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고정 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 등은 18일 석유수출국기구(OPEC) 정상회담에서 변동환율제도를 도입할 것을 검토했다. 파이낸셜타임즈에 따르면 이들 산유국들은 이미 수천억달러 상당의 달러화 자산을 보유하고 있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더 직접적으로는 중국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달러화 자산 보유국이다. 원자바오 총리는 19일 달러화 약세에 대해 이례적으로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원 총리는 “1조4300억달러에 이르는 중국의 외환보유액을 운용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다”며 “외환보유액 가치가 전례 없는 압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외환보유액 구성 비율을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애널리스트들은 3분의 2 이상이 달러화 자산인 것으로 추정된다. 상황은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10월 말 기준으로 2601억달러에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달러화 자산 비중이 60%를 크게 웃도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보다는 작은 규모지만 달마다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 부담스럽다. 지난해 말 기준 2390억달러보다 211억달러나 늘어났고 2004년 말 1991억달러와 비교하면 610억달러나 늘어났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외환보유액 비중도 4%에서 27% 수준까지 가파르게 불어났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중국과 일본, 러시아, 대만에 이어 세계 5위 규모다.

세계적으로 외환보유액의 달러화 자산 비중은 2001년까지 70%를 유지하다 지난해부터 65% 밑으로 떨어졌다. 한은도 달러화 자산 비중을 줄이려고 고심하고 있지만 달러화 자산을 내다 팔면 환율 하락을 부추기게 된다. 한은은 오히려 달러화 자산을 사들이면서 환율하락을 방어해왔다. 외환보유액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왼쪽 축, 외환보유액 (단위 : 조원) 오른쪽 축, 환율 (단위 : 원)

국내 언론은 그동안 수출 기업들 이해를 대변해 한은에 적극적인 환율 대책을 주문해 왔다. 그러나 환율 방어에 소요되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통화안정증권과 외국환 평형기금은 결국 국민 전체의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게다가 달러화 약세에 따라 외환보유액의 환차손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외환보유액을 마냥 늘릴 수 없다는 이야기다.

당장 9월 말과 비교해도 외환보유액 2573억달러를 환율 930.9원 기준으로 환산하면 239조원5120억원이지만 10월 말 2601억달러는 환율 914.8원 기준으로 237조9770억원이 된다. 외환보유액이 28억달러나 늘어났는데도 원화 기준으로는 오히려 1조5350억원이나 줄어들었다. 하루 빨리 달러화 자산 비중을 줄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때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환율을 방어하겠다”며 환율 개입에 나섰던 한은은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 한은 관계자는 “달러화 자산을 줄이고 유로화나 엔화, 파운드화 등으로 투자 대상을 다변화하고 주택저당채권(MBS), 자산유동화증권(ABS), 금융기관채 등 고수익 상품 비중을 확대해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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