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자총액제한제도는 불필요한 기업규제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혀 왔다. 그동안 대기업들은 이 제도 때문에 인수합병과 설비투자가 위축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언론도 이들의 주장을 확대 재생산해 왔다. 25일 공정거래위원회가 공개한 조사자료는 이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허풍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출자총액제한제도는 대기업들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을 막기 위한 제도다. 자산총액 10조원 이상인 기업집단 소속의 기업에 한해 계열사와 비계열사를 불문하고 국내회사에 순자산의 40%를 초과해 출자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다. 출총제는 1986년 처음 시행돼 IMF 직후인 1998년 폐지됐다가 1999년 공정거래법을 개정하면서 부활, 2002년 4월부터 다시 시행됐다.

당초 출총제는 자산총액 6조원 이상 기업집단을 대상으로 출자 제한을 순자산액의 25%로 규정했는데 올해 4월 공정거래법이 다시 개정되면서 10조원과 40%로 크게 완화됐다. 게다가 2조원미만 계열사들은 출총제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일부에서는 이미 출총제가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기업 단체들은 출총제가 기업의 투자를 막는다는 주장을 계속해 왔다.

애꿎은 출총제 타박 언제까지.

공정위에 따르면 공정거래법 개정 이후 출총제 적용대상은 399개에서 25개로 줄어들었고 이들 25개 기업의 출자여력은 37조4천억원으로 늘어났다. 기존 출자액 14조9천억원의 2.5배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출총제 때문에 투자를 못한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출총제 때문에 추가 출자를 할 수 없는 기업은 금호석유화학과 금호타이어 등 2개 밖에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호그룹 계열사들은 지난해 대우건설 인수 이후 출자 한도액을 모두 소진했다.

출총제 대상 기업들 가운데 출자여력이 가장 큰 곳은 삼성그룹이다. 출자여력이란 기업이 출총제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이다. 삼성전자 15조2797억원을 비롯해 9개 계열사들의 출자여력이 21조2030억원에 이른다. 이밖에 현대자동차그룹이 8조836억원, 롯데그룹이 5조2355억원, 한진그룹이 1조3582억원 등이다.

26일 아침 주요 일간지의 출총제 관련 기사는 그동안 대기업의 허풍을 비판하는 쪽과 대기업의 논리를 대변해 이번 기회에 출총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뉜다. 똑같은 결과를 놓고 해석이 다른 셈이다.

한겨레는 17면 <출총제로 추가출자 못하는 기업 단 2곳>에서 “출총제가 기업들 발목을 잡는다는 재벌그룹들의 주장이 근거가 없어지게 됐다”고 평가했다. 한국일보도 “사실상 출총제가 명목만 남게 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8면 <재계 "출총제 껍데기면 왜 안 없애나">에서 “공정위에서는 이를 근거로 ‘기업들이 출총제 때문에 투자를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재계에서는 반대로 ‘껍데기만 남았다면 출총제를 뭐하러 붙들고 있겠느냐’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껍데기 뿐이니 남겨둬도 된다는 주장과 껍데기 뿐이라면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한경은 “사전 규제 성격의 출총제는 아예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공정위의 인력과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업의 협력비용을 늘리고 여전히 향후 투자 계획의 불확실성으로 작용한다”는 주장을 소개했다.

논리 부재 출총제 비판, 정치면 동원해 확대 재생산.

한경은 또 6면 <대기업관-출총제·금산법·수도권 해법 제각각>에서 출총제 폐지를 주장하는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와 이회창 무소속 후보의 주장을 비중있게 소개하기도 했다. 이명박 후보는 “출총제를 없애 기업들 투자를 늘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회창 후보는 “우선은 완화하고 지배구조 투명성을 높이면서 궁극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머니투데이 등은 공정위 발표를 아예 싣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23일 출총제를 폐지하자는 이회창 후보의 주장을 제목으로 뽑기도 했다. 보수·경제지들은 공정위 발표 이후에도 출총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 출총제가 기업의 투자를 막는다는 전경련 등의 주장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이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나 자기반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선 국면을 맞아 이런 논리 부재의 주장이 경제면을 넘어 정치면까지 확산되는 양상도 보인다. 정책 대결이 실종된 후진 정치의 한 단면이다.

출자 제한이 투자를 제한한다는 억지 주장,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한편 투자와 출자의 상관관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경련 등은 IMF 이후 설비투자 부진을 이유로 규제완화를 주문해왔다. 글로벌 경쟁력을 구축한 삼성전자나 SK텔레콤, 현대자동차 등은 모두 문어발식 다각화의 산물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많은 언론이 간과하고 있거나 일부러 무시하고 있지만 출자총액제한제도의 핵심은 결국 총수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순환출자를 규제하는 데 있다. 신규 사업에 진출할 계획이라면 계열사 출자가 아니라 연구개발 투자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출자 제한 때문에 투자를 할 수 없다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출자나 투자나 기업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유명무실한 제도라면 장기적으로는 폐지돼야 하겠지만 그전에 선결돼야 할 것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재벌 대기업의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는 일이다. 언론은 핵심을 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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