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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워치로 심전도 측정, 직접 해봤다.

Written by leejeonghwan

June 4, 2019

오랜만에 미국에 온 김에, 공항에 내리자 마자 ECG 앱을 실행시켜봤다.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한국에서만 안 되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애플워치에 심전도 기능이 활성화된 게 지난해 12월이다. 이미 애플워치 4에 심전도 기능이 들어가 있었는데 FDA(연방식품의약국) 허가를 받느라 늦어진 것이다. 한국에서는 된다 안 된다 논란이 있었지만 일단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애플은 정작 아직 신청조차 하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이폰 업데이트와 함께 한국에서도 심전도 기능이 활성화됐다. 설정까지는 들어가지만 실제로 실행이 안 되는 단계. 한국에서 출시된 애플워치는 아예 안 될 거란 관측도 있었지만 하드웨어 문제는 아니고 애플워치에 연동된 위치 기반으로 실행 여부를 결정하는 듯. 그래서 언어와 지역 설정을 바꿔도 실행이 안 된다. 미국에서 산 애플워치도 한국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미국에 오니 되더라. (최근 업데이트에서는 허용된 지역을 벗어나면 자동으로 차단되는 지오펜스 기능을 도입했다고 한다.)

암튼 심전도 측정은 매우 흥미로웠다. 앱을 켜서 용두(디지털 크라운)에 반대편 손가락을 갖다 대고 30초를 기다리면 측정 결과가 나타난다. 원래 심전도 측정은 12개의 전극(lead)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애플워치는 손목과 디지털 크라운, 그러니까 전극이 2개 밖에 안 되고 본격적인 심전도 측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의료 기기로 승인을 받지 못했고, OTC(Over the Counter, 일반 의약품) 디바이스로 등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OTC라는 건 의사의 처방전 없이 누구나 돈만 내면 살 수 있다는 이야기.

그래서 애플워치로 측정한 심전도 결과는 아무런 의학적 근거가 될 수 없다. 다만 심장 박동이 지나치게 높거나 지나치게 낮을 때 알람 메시지를 주고(이건 한국에서도 되지만) 심전도를 측정해 부정맥이나 심방세동의 징후를 파악할 수 있다. 역시 의사의 진단이 필요하지만 구급차를 부를지 말지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전극이 2개 밖에 안 되지만 부정맥은 상당히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고 한다. (“가슴이 아파요”가 아니라 “부정맥이 있는 것 같아요”라고 할 수 있겠지. 실제로 미국에서는 애플워치 결과를 보고 병원으로 달려가 목숨을 건진 경우가 여럿 보고된 바 있다.)

엄청나게 대단한 기능은 아니지만 이 정도 낮은 단계의 기능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게 답답할 따름. 내 심장이 어떻게 뛰고 있는지 리얼타임 그래프로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흥미로운 경험이다. PDF 파일로 저장해서 의사에게 전송할 수도 있다. 원격 의료가 허용되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심각한 이상이 있다면 바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인 데이터다.

한국에서도 휴이노라는 기업이 스마트워치 기반으로 혈압과 심전도를 측정하는 기술을 개발했으나 역시 식약처 등의 반대로 출시가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휴이노가 허용되면 애플워치도 허용되겠지만 둘 다 쉽지 않을 듯. 게다가 애플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로 허용을 받았다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

단순히 규제 완화의 이슈라기 보다는 법 체계를 바꿔야 하는 문제라서 더 어렵다. 지난 2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손목시계형 심전도 장치를 활용한 심장관리 서비스를 규제 샌드박스로 지정하긴 했지만 한국에서 애플워치로 심전도를 측정하고 의사와 상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원격 의료에 대한 여러 우려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런 세상이 오면 몇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내 심장은 아직까지 아주 정확하게 뛰고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일단 부정맥은 없는 것으로.

 

(6월8일 추가. 미국에서 활성화시켰더니 한국에 돌아와서도 됩니다. 아이폰 설정은 미국+영어로 해둔 상태고 바꾸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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