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평평하지 않다(The world isn’t as flat as it used to be)”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선언했다.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만이 2005년에 쓴 ‘세계는 평평하다’를 패러디한 말이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세계화의 시대가 끝나고 국가권력이 다시 목소리를 내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 신문은 이를 신민족주의(new nationalism)라고 규정했다. 30일 주요 언론이 이를 비중있게 인용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세계가 다시 울퉁불퉁해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0년 전만 해도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러시아는 국제통화기금(IMF)와 세계은행 등에 손을 벌렸는데 지금은 아니다. 무역 장벽이 다시 높아지고 있고 국부펀드의 영향력도 부쩍 늘어났다. 석유와 가스 등 천연자원을 확보한 국영기업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나라마다 이민 규제도 강화하고 있다. 선진국은 세금을 인상하고 규제를 강화하고 있고 개발도상국들은 농산물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분명히 미국이 주도해왔던 세계화에 역행하는 움직임이지만 월스트리트저널의 이 기사는 지난해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놓쳐버린 미국의 다급함과 절박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미국은 당장 자신들의 위기를 극복하기에도 힘겨운 상황이다.
기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동안 미국의 잘 차려놓은 밥상이나 마찬가지였던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러시아는 미국의 통제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국부펀드를 내세워 헐값에 나온 미국 기업 사냥에 나섰다. 미국은 그동안 천연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심지어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젠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됐다.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이르지만 기축통화 역할을 해왔던 달러화의 지위도 흔들리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막강한 구매력을 내세워 세계를 협박해 왔지만 세계 여러 나라들은 조금씩 미국 의존도를 줄이면서 미국의 대안을 찾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과연 이런 변화가 프리드먼이 말한 아름다운 세계화와 정면으로 배치되느냐는 것이다.
프리드먼은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자유무역이 빈곤을 퇴치하고 경제성장을 불러오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프리드먼은 이 책에서 “더 개방적이고 경쟁적인 시장만이 국민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줄 지속가능하고 유일한 성장엔진”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누구도 이 점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국과 인도의 사례를 충분히 제시했다.
프리드먼은 이를 근거로 3년 전 “세계는 평평하다”고 선언했지만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제와서 “세계가 다시 평평하지 않게 됐다”고 진단하고 있다. 여기에 이 ‘세계 평평’ 이론의 진짜 의도가 숨어있다.
세계가 평평하다, 또는 평평한 세계가 모두에게 이롭다, 더 나아가 세계가 평평해져야 한다는 주장은 철저하게 미국의 이해를 반영한 이데올로기다. 더 정확히는 미국을 중심으로 무한 증식하고 있는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반영한 세계관이다. 국경을 허물고 규제를 없애고 자본에게 무제한의 이익을 허용하는 완전 자유시장이 평평한 세계의 핵심 가치였다. 그런데 그 가치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의 불만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세계는 이제와서 평평하지 않게 된 게 아니라 한번도 평평해진 적 없고 애초에 평평해질 수도 없었다.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이 떠들어 대는 아름다운 세계화는 초국적 자본의 무한 증식을 위한 허상일 뿐이다. 무역 장벽이나 자원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과 국부펀드에 대한 경계 역시 철저하게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대변한다.
우리나라 언론의 관련 기사는 철저하게 월스트리트저널이 만든 프레임에 갇혀 있다. 매일경제는 “무역과 투자 장벽이 높아져 세계 경제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내용을 제목으로 뽑아 올렸다. 한국경제는 “신내셔널리즘이 글로벌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제목을 썼고 비교적 비판적인 논조를 유지한 한겨레도 기사를 거의 그대로 전재한 뒤 “국가(정부)의 경제적 영향력은 추세라기 보다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며 기술의 진보가 경계를 넘어 개인들의 힘을 계속 강화할 것”이라는 프리드먼의 말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