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가다. 모든 작가는 정치에 거리를 두려는 충동을 느낀다. 평화롭게 책을 쓸 수 있도록 내버려 두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이상은 기업형 슈퍼마켓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구멍가게 주인들의 꿈보다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글 쓰는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일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지만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글은 의미가 없다고 단정 짓는다.
조지 오웰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에서 경찰로 일했던 적이 있다. 경찰을 그만 두고는 프랑스에서 한동안 부랑자로 떠돌기도 했다. 영국에 돌아와서는 탄광촌 노동자들의 삶을 취재했고 스페인 내전 때는 파시즘에 맞서는 공화국 민병대에 자원해서 전쟁에 뛰어든다. 그가 당신들이 전쟁을 아느냐고, 혁명을 아느냐고 독자들을 나무랄 수 있는 건 그가 직접 전쟁의 참혹함과 혁명 전야의 피 끓는 열정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오웰이 언젠가 공원에서 가젤에게 먹이를 주고 있을 때였다. “가까운 길에서 작업을 하던 아랍인 인부 하나가 묵직한 곡괭이를 내려놓더니 쭈뼛쭈뼛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자못 놀랍다는 듯 가젤을 보다 빵을 보고 빵을 보다 가젤을 보았다. 말은 안 해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그는 쑥스러운 듯 프랑스어로 한 마디 했다. ‘그 빵은 나도 먹을 수 있는데.'”
오웰이 버마에서 경찰로 일하던 무렵, 코끼리가 난동을 부린다는 신고를 받았다. 오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코끼리는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지만 오웰은 “백인 나리는 백인 나리답게 행동해야 한다”면서 결국 코끼리를 총으로 쏜다. 오웰은 “원주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안달하고 그들이 예상하는 바대로 행동해야만 하는 게 지배의 조건이었다”면서 “나의 모든 생활은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한 기나긴 투쟁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사형수를 끌고 교수대로 가던 날 아침, 오웰은 그가 물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걸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설 때도 10분의 1초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뚝 떨어질 때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읽어내는 오웰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감수성, 그리고 직관적이면서도 압축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이었다. 오웰은 정치적이지 않은 글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자기기만이라고 말한다. 오웰은 “평화로운 시대 같았으면 나는 화려하거나 묘사에 치중하는 책을 썼을지도 모르며 내 정치적 성향에 대해 거의 모르고 지냈을지도 모른다”면서 “실제로는 일종의 팜플렛 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고 있다.
오웰은 이 책 전반에 걸쳐 지식인들의 허울과 위선을 고발하고 비판한다. 좌파의 이중성과 허위의식을 비꼬기도 한다. 오웰은 공허한 거대담론을 넘어 이야기되지 않고 있는 것들과 잘못 이야기되고 있는 것들을 폭로하고 바로 잡는데 평생을 바쳤다. 말로만 혁명과 전쟁을 떠들기는 쉽지만 그 이면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희망과 아픔, 분노를 읽어내는 건 그가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노동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건 정말 쉽다. 적당히 멋있게 보일 수도 있고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기도 하니까. 최저임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쉽다. 4대강 개발사업을 반대하고 복지 예산을 늘리라고 요구하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웰처럼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好惡)와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을 하려면 치열한 사고와 학습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제목은 “나는 왜 쓰는가”지만 더 정확하게는 ‘나는 왜 쓸 수밖에 없었는가’에 가깝다. 오웰에게는 글을 쓴다는 게 위선과 허위의 시대, 대중을 호도하는 가짜 혁명의 시대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었던 셈이다. 자기반성 없는 얼치기 좌파들에게 오웰은 ‘너희가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고 묻는다. ‘너희는 과연 너희 이웃들의 아픔을 아느냐’, ‘너희는 정말 제대로 싸우고 있느냐’고 묻는다.
“노동계급 사회주의자에게 물질주의가 어떠니 설교하는 이런 정치인, 성직자, 문인 같은 이들의 파렴치함이란! 노동계급이 요구하는 것들은 모두 그런 파렴치한들 입장에서는 없으면 인간적인 삶이 불가능하다 싶을 최소한의 불가결한 것들이다. 충분한 식량, 지긋지긋한 실업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자기 자식들은 공평한 기회를 누릴 것이라는 안심, 하루 한 번의 목욕, 적당히 자주 세탁된 깨끗한 시트, 새지 않는 지붕, 일과가 끝나고 나서도 약간의 에너지가 남을 정도의 짧은 노동시간인 것이다. 물질주의에 반대하며 설교하는 자들 중에 그런 것들 없는 삶이 살 만하다고 생각할 이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20년 동안만 마음을 쓴다면 그런 최소한 것들을 정말 쉽게 얻어낼 수 있으리라. 전 세계의 생활 수준을 영국 수준만큼 올리는 일은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전쟁보다 힘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 자체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류의 진짜 문제에 접근하자면 그 전에 궁핍과 가혹한 노동부터 철폐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개인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며 보통의 인간이 소처럼 노역에 시달리거나 비밀경찰 때문에 떨고 있는 한 그런 문제에 접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노동계급의 물질주의는 얼마나 정당한가! 가치의 척도보다는 시간의 차원에서, 정신보다는 고픈 배가 우선인 줄을 아는 그들은 얼마나 온당한가! 그런 사실을 이해한다면 지금 우리가 견디고 있는 긴 악몽을 최소한 이해는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지음 /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펴냄 / 1만8천원.
글 읽어 보고 궁금해서 찾아 읽어 보아야만 했습니다. 번역된 책에는 여러 개의 수필을 엮어 두었나 보군요. 정환님의 글, 늘 RSS로 잘 받아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