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2018년 5월16일 전남대학교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촛불 혁명 이후 한국 언론 지형의 변화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 전문입니다.)

1980년 5월 광주에 언론은 없었다. 언론은 계엄사령부의 보도자료를 받아쓰면서 시위에 가담한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붙이면서도 계엄군의 발포 사실은 침묵했다. 조선일보는 5월22일 “광주지역 소요가 악화된 원인은 전국적인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서울을 이탈한 학원소요 주동학생 및 깡패 등 현실불만 세력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사실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뜨린데 그 원인이 있다”고 계엄사령부의 발표를 인용해 보도하기도 했다.

언론은 시민군의 총기 탈취와 방화 등 과격 시위에만 초점을 맞췄다. 경찰과 군인의 사망자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기사가 나가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27일 “국군이 선량한 절대다수 광주 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라면서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비상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철저한 보도통제의 결과였지만 방송의 경우는 왜곡이 더욱 심했다. 북한군의 무력 훈련 장면을 반복해서 비춰줬고 피 흘리는 계엄군과 시민군의 무장시위 장면을 교차 편집했다. 시민들이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배경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총을 난사했던 이 끔찍한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끝난 1987년에서야 비로소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전두환 신군부는 10·26 사태 이후 철저하게 언론을 통제했다. 언론사에 상주하고 있는 검열관들이 ‘검열 필’이라는 도장을 대장에 찍어줘야 인쇄를 할 수 있었고 7개월 가까이 검열이 계속되면서 자기검열이 자리 잡고 있었다. 5월16일 배포된 보도지침에는 “학생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지지하는 식의 기사는 모두 불가”, “동료가 부상하자 경찰도 흥분, 학생들과 육탄전에 가까운 근접 전투 벌였다 등은 불가” 등의 원칙이 적시돼 있다.

1. 투사회보, 한국 최초의 User Creative Contents.

그해 5월 광주에서 언론의 역할을 대신했던 건 시민들이 만든 ‘투사회보’와 ‘민주시민회보’였다. 투사회보는 광주 서구 광천동에 위치한 들불야학의 교사와 학생들이 모여 만든 B5 용지 1장짜리 유인물이었다. 21일 1호가 발간돼 25일 8호까지 발간됐고 ‘해방광주’ 이후 민주시민회보로 이름을 바꿔 9호와 10호까지 발간됐고 11호는 배포되기 전에 전량 압수됐다. 투사회보는 5000부, 민주시민회보는 1만5000부 정도가 인쇄됐다.

투사회보는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의 피 끓는 감정을 생생하게 증언해 준다. 21일 발간된 1호에는 “놈들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면서 “각 동별로 동사무소 장악, 동별로 집합”, “오후 3시부터 도청으로 진격하라”, “무기를 제작하라” 등의 행동강령과 함께 “우리는 피의 투쟁을 계속한다”는 등의 과격한 문구가 등장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과격한 선동보다는 조금씩 질서를 잡아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23일 발간된 5호에서는 “최규하 정부는 즉각 물러가라”, “전두환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라”,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 구속중인 학생과 모든 민주 인사들을 즉각 석방하라”, “구국 민주 과도정부를 즉각 구성하라” 등의 정치적인 구호가 등장한다. 24일 발간된 6호에서는 “중고등학생들의 무기 소지를 금지한다”, “계엄군이 발포하지 않는 한 우리가 먼저 발포하지 않는다”는 행동강령도 적시돼 있다.

주류 언론이 철저하게 광주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가운데 투사회보는 유일한 신문의 역할을 했다. 투사회보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투사회보 배포와 함께 취재활동을 병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6호에는 “현재 병원에서 확인된 시체가 102명, 변두리에 버려진 시체, 군인들이 실어 간 시체가 550명, 합계 6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중상자 500여명, 경상자를 포함, 총 2천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다음은 투사회보 6호 전문이다.

광주시민의 민주화 투쟁
드디어 전국적으로 확산되다.

광주시민은 하나로 뭉쳐 더욱 힘을 내어 싸웁시다!
계엄당국의 끊임없는 억압과 허위사실 날조에도 불구하고 민주화투쟁의 열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전남도민은 분연히 일어섰다
민주화투쟁은 광주, 목포, 담양, 장성, 나주, 보성 등 16개 시군으로 확산되어 유신잔당의 반민주 억압에 항거 더욱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세계각지의 언론기관은 광주사태의 진상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으며 한국기자협의회의 기자들은 광주에 잠입하여 진상취재에 앞장서고 있다.

우리의 행동강령.
첫째, 광주시민은 최규하정부가 총사퇴할 때까지 끝까지 싸운다.
둘째, 광주시민은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무장을 강화한다.
셋째, 중고등학생의 무기소지를 금한다.
넷째, 계엄군이 발포하지 않은 한 우리가 먼저 발포하지 않는다.
다섯째, 광주시민은 대학생들의 질서있는 투쟁에 전적으로 협력한다.

민주시민들이여! 서로 힘을 합(合)합시다.

광주시민 민주투쟁 협의회.

이들은 투사회보를 통해 계엄령을 철폐할 것, 살인마 전두환을 처단할 것, 구속 중인 학생과 시민, 민주인사들을 즉시 석방하고 구국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 요구했다. “정부와 언론은 이번 광주의거를 허위조작, 왜곡보도 하지 말라”면서 “이상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우리는 끝까지 투쟁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투사회보는 이들이 체제전복을 노리는 무장폭도가 아니라 민주화를 열망하는 평범한 시민들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기록이다.

24일 배포된 “전국 민주시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에서는 고립된 광주 시민들의 절박함이 드러난다. “80만 광주시민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고 또 울었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오, 처절하고 참혹함이여. 인간 세상에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억누를 길 없는 울분으로 목이 메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메임은 또한 치솟아오르는 분노와 의기의 함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목이 메이도록 외치고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25일 배포된 “최규하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에서는 “이번 사태는 정부의 잘못임을 시인해 주시고, 사과와 용서를 청해 주시옵고, 이미 약속하셨지만, 모든 피해에 대하여 정부가 보상하고, 어떤 보복조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옵기 피눈물을 삼키면서 간곡히 간언드린다”고 밝히고 있다. 그날 도청에서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자는 쪽과 끝까지 저항하자는 쪽이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다음은 민주시민회보 10호 전문이다.

광주시민 장송곡.

무진벌의 백성들이 횃불을 들었다.
손에 손을 맞잡으니 피끓는 형제여!
조국 위해 바친 몸이 무슨 죄란 말인가!
독재자의 총칼 앞에 수천이 죽다니.
피에 젖은 민주 함성 끝까지 지키리니.
설운 눈물 거두시고 고이 잠드소서.

붉은 피만 낭자쿠나 도청앞 분수대
서러워서 못 견디는 풀잎 피리소리
가슴 펴고 외치노라 평화와 자유를
민주 혼은 살아 있다 무진벌 골짜기
자랑스런 민주투사 젊은 영들이여
정결한 피 최후의 날 우리 승리하리라.

삼천만의 동포들아 정의의 칼을 들라
젊은 영들 목쉰 절규 어찌 잊으랴
용기있게 나가리라 민주의 봉우리
최후의 순간까지 겨레를 위하여
자랑스런 민주투사 젊은 영들이여
정결한 피 최후의 날 우리 승리하리라.

무등산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1. 우리는 명분 없는 비상계엄의 해제와, 반민족적이요 역사를 역행하는 유신세력의 일소를 위해 끝까지 싸운다. 이는 민족사의 요청이다.
2. 우리는 전두환 쿠데타 세력이 득세하는 현 정부당국을 국민의 정부로서 인정할 수 없다.
3. 온 국민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고 자립경제를 이룩하고 복된 사회를 건설코자 납입한 피와 땀(세금)으로 페퍼포그, 최루탄 및 총기를 수입하여 국민의 배를 가르고 가슴에 총을 쏘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 광주시민은 이들 유신 미치광이들을 위한 세금이요 방위성금이라면 단 한 푼이라도 납입하기를 거부한다.
4. 광주의거에 관한 계엄사의 발표 일체가 거짓임을 밝힌다. 또한 이를 신뢰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사상자 천 명 이상 – 수습대책위 통계).
5. 우리 80만 광주시민은 앞면의 ‘광주시민 장송곡’을 누구나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이 회보를 입수하신 분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여 보급 및 전파에 최대의 힘을 역주하여야 할 것이다.
6. 군인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대답하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온 국민의 희망을 저버리고 사리사욕에 광분하는 전두환 일당을 위해서인가? 우리가 지난날 국토방위 임무에 충실했던 국군이었듯, 그대들도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민간인이 아니었단 말인가? 당신 일개인의 반기가 조국과 민족을 구하는 길임을 명심하라!

1980년 5월 26일
광주시민학생구국위원회(구 수습대책위원회)

그리고 26일 저녁 150여명이 도청에 남아 계엄군에 맞선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도청을 넘겨준다는 것은 먼저 죽은 사람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일이며 누군가는 남아서 계엄군과 맞서 싸우고 죽음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도청에 남아있었던 사람들 상당수가 구두닦이나 넝마주이, 일용직 노동자 등 가진 것 없고 못 배운 밑바닥 민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도청 사수파’였던 민주시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을 맡고 있었던 윤상원 열사는 25일 아침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들불야학 교사로 투사회보의 편집장 역할을 맡았던 윤상원은 5·18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던 많지 않은 엘리트 가운데 한명이었다. 국내 언론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지만 윤상원의 인터뷰는 외신을 타고 세계 곳곳에 전해졌다.

미국 볼티모어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1994년 월간 ‘샘이깊은물’에 기고한 글에서 그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투사회보는 국내 최초의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였을지도 모른다. 주류 언론이 침묵하거나 왜곡 보도를 일삼고 있는 가운데 이에 분노하는 독자들이 직접 콘텐츠의 생산자가 되고 진실을 고발하고 독자들과 상호 소통하고 행동을 끌어내는 투사회보의 계보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서 와이브로와 디지털 카메라로 무장한 수많은 시민기자들의 활약으로 이어졌다. ‘군화발’과 ‘물대포’ 동영상 등이 모두 시민기자들의 특종이었다.

투사회보를 제작해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았던 서대석 전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에 따르면 투사회보는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인쇄했다. 엄밀히 말하면 인쇄가 아니라 동판에 철필로 직접 써서 등사기에 미는 완전 수작업이었다. 하루 밤을 새면 5천장 정도를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B5용지 크기로 일간 형태로 발행됐는데 저녁에 편집 작업을 마치면 밤새 인쇄를 마치고 아침에 배포했다.

투사회보는 처음에는 집회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계엄군의 발포 이후에는 시민들의 동요를 막고 질서를 잡기 위한 목적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5000장 정도 찍었는데 민주시민회보로 바뀌고 도청 앞 YWCA에서 등사기로 인쇄하기 시작하면서 2만 부까지 늘어났다. 서대석 전 비서관은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투사회보를 찍을 거라고 하니까 트럭 가득히 인쇄용지를 실어줬는데 그 외상값은 결국 갚지 못했다”고 말했다.

2. 가두방송, 무너진 공영방송이 전하지 못했던 피 끓는 외침.

광주MBC 방화 사건이 주는 의미도 크다. 1980년 5월20일 저녁, 분노한 시위 군중이 궁동 광주MBC 사옥으로 몰려갔다. 400여명의 시민들이 방송국에서 공정 보도를 요구하며 항의하는 도중, 갑자기 펑하는 폭발음이 들리면서 불이 붙었다는 게 시민들의 증언이었다. 정확히 최초 발화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방화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소설가 황석영씨는 당시 상황을 소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서 다음과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텔레비전에서는 평소처럼 연속극이나 오락 프로그램만 방영되고 있었다. 나라의 한편에서는 ‘집단적인 인간사냥’이 벌어지는데, 텔레비전에서는 다리를 흔들어대며 춤을 추는 출연자의 모습만을 내보내고 있었다. 광주 시민들은 배신감과 타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러한 감정들이 다음날 시위대가 문화방송국을 불태워버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방송국이 불타던 그 시간, 시내에서는 가두 방송이 방송의 역할을 대신했다.

전옥주씨는 평범한 미혼 여성이었다다. 5월19일 아침 군화발에 짓밟히는 시민들을 목격하고 가두방송을 결심했다고 한다. 양동 복개상가에서 가두방송을 위한 앰프를 마련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더니 45만 원이 금방 걷혔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마련한 앰프는 최루탄에 맞아 부서졌고 인근 동사무소에서 스피커를 떼오면서 숙직실에 남은 돈 7만 원을 두고 나왔다. 이게 뜨거웠던 열흘 광주를 지켰던 가두방송의 시작이었다.

전옥주씨는 CBS와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방송을 하고 시신을 운반하고 도청 앞에 오니까 누군가 ‘저 여자는 간첩이다. 간첩이 아니고는 저렇게 말을 잘 할 수가 없다. 세뇌 교육을 받지 않고는 저렇게 할 수가 없다’’고 외쳤다. 그냥 귓전으로 흘려듣고 다시 방송을 하며 광주 공원으로 갔는데 거기서 또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를 간첩이라고 외쳐댔다. 그러니까 순식간에 그렇게 나를 따라줬던 시민군들이 나를 에워싸서 포승줄로 뚤뚤 묶어 세워놨다. 그래서 ‘나는 간첩이 아니다. 나는 전직 경찰 가족이고, 내 아버지는 퇴직금마저 국가에 헌납했던 분이다. 나는 아니다’라고 외쳤지만 시민군들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확인 차 집으로 가다가 따라 온 사람들 가운데 나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간첩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이 돼서 풀려나게 됐고, 다시 방송을 하게 됐다.”

신동아 보도에 따르면 전옥주씨에 앞서 가두방송을 한 시민들도 있었다. 차명숙씨의 증언에 따르면 19일 오후 4시, 광주역 앞 사거리에서 중년의 아주머니가 확성기로 외치고 있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고 난동자도 아닙니다. 선량한 광주 시민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아무 죄 없이 우리 학생, 시민들이 죽어가는 것을 더 이상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나섭시다. 학생들을 살립시다. 계엄군을 물리치고 우리 스스로 광주를 지킵시다.”

본격적으로 가두방송팀이 조직된 것은 23일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이후다. 항쟁지도부가 조직한 가두방송팀이 있었지만 전옥주씨와 차명숙씨를 비롯해 5~6명의 남성들이 함께 하는 방송팀의 활약이 더 컸다고 한다. 27일 도청 앞 방송을 한 박영순씨와 군인들 앞에서 선무방송을 했던 홍금숙씨, 20일 오후 한국은행 쪽에서 시작한 이재의씨, 이경희씨 등 곳곳에서 가두방송이 터져나왔다.

다음은 월간중앙 1988년 5월호에 실린 고정희 시인의 ‘광주 민중항쟁과 여성의 역할 – 광주여성들 이렇게 싸웠다’ 가운데 일부다.

“보십시오. 우리의 형제가 이렇게 죽었습니다. 지금까지 계엄군은 우리 형제 자매의 시체를 탈취해 가고 단 한사람도 죽지 않았다고 보도하지만 여러분, 똑똑히 보십시오. 여기 우리 형제가 죽어 있습니다.”

이 방송을 들으며 시민들은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다. 오전 9시에 이미 금남로는 10만이 넘는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손자를 끌고 시위장에 나온 할머니, 어린 꼬마를 데리고 나온 가정주부, 근무를 포기하고 나온 여성근로자들이 대거 시위대에 참여했으며 이날 안침부터 시내 어느 동네를 가든지 시위군중과 청년들을 위해 여성들이 마련한 음식들이 길가에 즐비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시민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면 어디든지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길목을 지키다가 지나는 시위차량을 멈추게하고는 김밥과 주먹밥을 한 함지씩 실어 주는 것이었다.

광주 시민이면 아무나 찾아와 요기를 할 수 있었고 어느 곳에나 푸짐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시장 아주머니들이 가장 열성이었다. 그들은 지난 며칠 동안의 참상을 똑똑히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양동시장·대인시장·학동시장·산수시장·서방시장 등에서는 조직적으로 밥과 반찬이 공급되고 있었다.

전투가 치열했던 금남로에는 동별로 나온 수백 명의 가정주부들이 김밥을 함지에 담아 도로에 펼쳐 놓고 시위대에게 나눠 주었으며 주먹밥·달걀·김치·음료수·빵 등 각양각색의 음식이 형제자매들의 손에 아낌없이 나뉘어졌다. 손 매듭이 굵고 고생의 흔적이 역력한 이 여성들은 이들 시위대 모두를 식구처럼 여기고 그들에게 요기를 시켜주는 일이 곧 자기 혈육을 먹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였다. 시위대들은 그 음식들이 차량 위로 실려질 때마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면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정의감에 불탔다.

이 주먹밥이야말로 광주 공동체의 피로 맺어진 약속의 밥이었다. 밥을 먹는 시민들은 자신이 광주 공동체 가 뽑아서 민주화 전선으로 내보낸 전사임을 새롭게 자각했고 밥을 해준 주부들은 비인간적인 공포로부터 벗어나 그것들을 몰아내는 데 자신이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에 신바람이 나서 밥을 나누어 주지 않고는 못배기는 모습이었다. 이와 같은 식사의 연대는 금남로의 시위 군중을 새로운 전의에 불타도록 만들었고 뜨거운 시민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공수부대 하사관이 쓴 수기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도 있다. “그 여자의 목소리는 밤하늘의 시민들에게는 슬픔과 울분, 분노 등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목소리 또한 얼마나 고운지 처음에는 불에 탄 문화방송국의 아나운서가 화가 나서 선무방송을 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 여자를 저격해 사살하려고 집요하게 추적했으나 시위대에 둘러싸여서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전에는 저격할 수 없었다.”

전옥주씨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20일 밤의 시위에서 성난 군중들의 대오를 지휘하며 내 머릿속에 꽉 찬 한 가지 생각은 이대로 외치다 죽어도 좋다는 것, 내 목숨 역시 몇 시간 전 내 손으로 리어카에 담아 옮긴 저 참혹한 몇 구의 시신들처럼 이미 아무렇지 않게 죽은 목숨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믿을 수 없는 폭력과 참상, 거대한 불의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과 분노가 솟구쳐 나를 어떤 지점으로 끝없이 휘몰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계엄군 진입을 앞둔 27일 새벽 마지막 가두방송을 했던 사람은 항쟁지도부 소속 홍보부원 박영순씨였다. 5·18 기념재단에 따르면 5·18 마지막 방송은 가두가 아닌 전남도청 1층 방송실에서 이뤄졌으며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광주시내에 울려 퍼졌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박영순씨는 계엄군이 발포하기 전에 먼저 총을 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세 차례 이상 힘주어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10∼15분쯤 지났을 무렵,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방송은 중단됐고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계엄군이 들이닥쳤다는 게 5·18 기념재단의 조사 결과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박씨와 함께 있던 이흥철씨, 신원미상의 여중생 등 3명은 방송실에서 바로 연행돼 상무대에 끌려가 취조당했고 박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6개월을 복역한 후 석방됐다.

방송반을 구성해 조직적인 선동활동을 했다는 계엄군의 주장과는 달리 방송활동은 특별한 명칭이나 조직체계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졌다는 게 5·18 기념재단의 설명이었다. 헌혈과 항쟁 동참을 촉구했으며 도청 내 방송실에서도 사망자 소식 등 도청 상황실 접수 내용이나 도청 앞 궐기대회 현황 등을 방송했다. 박영순씨는 27일 새벽 2시까지 도청 방송실을 떠나지 않았다.

차명숙씨는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한 달 가까이 징벌방에 갇혀 있었다. 차명숙씨는 2018년 4월 기자회견에서 “하얀 속옷이 까만 잉크색으로 변하도록 살이 터져 피가 흘러 나와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너같은 것들은 죽어도 총 몇발 쏴서 그 때 현장에서 총 맞아서 죽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협박을 했다고 한다. 차씨는 계엄법 포고령 위반 등의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1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전옥주씨는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호된 고문을 당했다. 1980년 9월 포고령 위반과 내란 음모죄 등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81년 4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전옥주씨는 “여성으로서는 겪을 수 없는 고통을 10일간 겪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박영순씨는 김대중 내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2015년 6월에서야 재심을 통해 무죄를 인정 받았다.

한겨레가 인터뷰한 김선옥씨는 전남대 음악교육과 재학 중이었다. 5월22일 책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강제 진압 현장을 목격하고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맡게 됐다. 계엄군이 진입하기 직전인 27일 새벽 3시 가까스로 도청에서 빠져나왔으나 그해 7월3일 교생 실습을 하고 있던 고등학교에서 계엄사령부 수사관들에게 연행돼 온갖 고문에 성폭행까지 당했다. 김씨는 “몇 달 전 미투를 보면서 그 나쁜 놈을 죽이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3. 언론이 시민의 무기가 될 수 있나.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의 주요 사건을 돌아보면 진실의 최전선에 섰던 건 언제나 시민들이었다. 한국 언론은 스스로의 이해관계의 함정에 빠져 있다. 진실은 가변적이거나 상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진실은 팩트와 팩트가 연결되는 지점에 있다. 언론이 진실을 편집하고 여론을 호도할 때마다 중심을 바로 세운 것은 행동하는 시민들의 집단지성이었다.

A. 촛불시위가 만든 아젠다 키핑.

2002년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6월13일, 경기도 양주군에서 중학생 두 명이 미군 탱크에 깔려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국 정부가 미국에 재판권 포기 요청을 했으나 거부 당했다. 결국 11월22일 동두천 캠프 케이시에서 열린 군사 재판에서 배심원단은 페르난도 디노와 마크 워커 등 미군 부사관 2명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무죄 평결을 내렸다. 두 사람은 5일 뒤 미국으로 출국했다.

끔찍하고 굴욕적인 사건이었지만 두 사람의 억울한 죽음은 월드컵 열기에 가려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네이트온 등 인스턴트 메신저에 리본이나 삼베 달기 등의 이벤트로 시작해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을 중심으로 촛불시위를 열자는 제안이 쏟아졌다. 첫 촛불집회가 열린 건 무죄 판결 직후인 11월26일이었다. 전국적으로 촛불집회가 확산되면서 비로소 언론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B. 준엄한 선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의 경험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로 이어졌다.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한다”는 발언이 촉발돼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발의됐고 2004년 3월9일, 재적 의원 271명 중에 195명 참석과 193명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이날부터 전국적으로 촛불집회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3월25일에는 전국적으로 35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촛불을 들었다.

결국 5월14일 헌법재판소는 탄핵 심판 기각 결정을 내렸고 노 대통령은 업무에 복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언론과 전면전을 벌였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에 맞서 정의를 바로 세운 건 광장을 가득 채운 촛불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노래였다. 애초에 명분이 없는 탄핵이었지만 들끓는 여론을 헌재 재판관들도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C. 세계가 깜짝 놀란 100만 촛불.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에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가 전국을 휩쓸었다. 4월 중순부터 일부 연예인 팬클럽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확산돼 중학생들이 먼저 손팻말과 촛불을 들고 시위를 시작했다. “너나 먹어 미친 소” 등의 구호가 터져 나왔고 MBC와 KBS 등의 방송 장악 음모에 맞서 “마봉춘 고봉순 힘내라” 등의 구호가 나온 것도 이때부터였다. 광화문에서 집회하던 시민들이 여의도까지 행진을 하기도 했다.

급기야 6월10일에는 전국적으로 100만 명의 군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미국산 소고기에서 시작해 의료 민영화와 한반도 대운하 등으로 의제가 확산됐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옥이 시위대의 습격으로 입구가 파손되거나 쓰레기가 잔뜩 쌓이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소고기 협상을 재협의하기로 양보했고 30개월 미만 소고기만 수입하기로 하는 등 일부 진전된 합의를 끌어냈다.

D. 마이크로+소셜 미디어의 결합, 대자보의 부활.

2013년에는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릴레이 대자보 운동이 확산됐다. 고려대 주현우씨가 붙인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다며 수 천 명이 직위해제되고 불법 대선개입, 밀양 주민이 음독자살하는 하 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불러일으킨 파문이 대학가부터 시작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안녕들하십니까’는 박근혜 정부 첫 해였던 2013년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자리잡았다.

‘안녕들하십니까’는 보수 정권의 연장을 맞아 암울한 한국 사회에 대자보라는 원시적인 매체를 이용해 공감과 저항의 정서를 끌어냈다. 땡전 뉴스가 세상을 지배하던 1980년대 대학가의 거의 유일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던 대자보가 부활한 것이다. 매스 미디어가 아닌 마이크로 미디어에 가깝지만 소셜 미디어의 확산에 힘입어 폭발적인 메시지 파워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 노란 리본이 만든 강력한 메시지와 연대.

2014년 4월16일 304명의 희생자를 남긴 세월호 참사. 노란 리본 달기 캠페인을 제안한 사람은 대학생 방혜성씨였다. 노란 리본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아젠다 키핑 역할을 했다. 방씨는 JTBC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커질 줄은 우리도 몰랐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미국의 CNN이 “노란 리본이 희망의 상징으로 유대를 이루고 있다(Yellow ribbons become symbol of hope, solidarity)”고 보도했을 정도다.

스포츠 선수들이 노란 리본을 달고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김상중과 이영애, 손태영 등 연예인들도 리본을 달고 TV 앞에 서기 시작했다. 2018년 동계 올림픽에서는 김아랑 선수가 헬멧에 부착한 노란 리본이 정치 선전에 해당한다는 일부 극우 성향 누리꾼들의 비난으로 리본을 떼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노란 리본을 다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국민들이 세월호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에 동참하는 효과를 만들었다.

F. 한 뼘 크기 포스트잇이 만든 거대한 분노와 연대.

2016년 5월17일 강남역 인근의 노래방 건물에서 20대 여성이 흉기로 찔려 살해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묻지마 살인이었지만 여성에 대한 증오 범죄라는 인식이 확산됐고 다음날부터 추모 행렬이 줄을 이었다. “우연히 살아남는 나는 여성입니다”라는 문구를 비롯해 수많은 포스트잇이 강남역 10번 출구를 뒤덮었다. 경향신문은 1004장의 포스트잇의 사진을 취합해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강남역의 집단 포스트잇은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운동의 페미니즘 버전이면서 불특정 다수의 연대라는 점에서 집단 커뮤니케이션의 진화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들이 직접 의제를 설정하고 주도하는 주체로 나서는 변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며칠의 시차를 두고 발생한 2016년 5월28일 구의역에서 발생한 스크린 도어 정비업체 직원의 사망 사고 때도 수많은 포스트잇이 나붙으면서 공기업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 이슈로 끌어올렸다.

G. 권력에 맞선 민중의 승리.

박근혜 탄핵은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쾌거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2016년 10월24일 JTBC의 태블릿 PC를 폭로하고 다음날 박근혜가 처음으로 최순실과의 관계를 공식 시인한 뒤 첫 주말인 10월29일, 3만여 명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촛불을 들었다. 중앙일보가 “이성적이어서 오히려 무서웠던” 집회라며 “시위 형태와 내용만으로도 평범한 시민들의 분노와 허탈을 충분히 전달했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TV조선을 시작으로 한겨레와 JTBC 등의 탐사 보도의 쾌거였지만 실제로 박근혜를 끌어내린 것은 1000만 촛불의 힘이었다. 23차 범국민행동 대회까지 주최측 추산 누적 인원이 1689만명에 이른다. MBC와 KBS 기자들이 집회 현장에서 ‘기레기’라며 욕을 먹고 쫓겨난 일련의 사건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끝까지 권력의 눈치를 봤던 언론과 달리 한국 국민들은 부패한 권력자를 끌어내리고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H. 강력한 피해자의 목소리.

서지현 검사가 2018년 1월19일 검찰 내부 통신망에 “나는 소망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JTBC에 출연해 8년 전 안태근 당시 법무부 정책기획단 단장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하면서 사회 전반으로 미투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시인 고은과 극작가 이윤택, 배우 조민기 등을 비롯해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수행 비서가 안 지사에서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자진 사퇴하는 등 광범위한 성폭력 문화가 드러났다.

일련의 미투 운동에서 주목할 부분은 익명의 피해자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교수에게 성희롱을 당한 학생들, 신이라고 불리는 연출자 앞에서 저항할 수 없었던 배우들,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는 거물급 정치인에게 영혼을 빼앗긴 정무직 공무원 등, 이들의 용기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언론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적을 뿐, 억압받는 사람들이 직접 강력한 스피커를 확보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I. 을의 미투, 재벌 공화국을 무너뜨릴까.

미투는 을의 미투로 이어졌다. 2014년 12월5일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의 장본인인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이 3년여 만인 2018년 3월, 칼호텔네트워크 사장으로 복귀한 사실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자본 권력에 취약하다는 증거다. 조씨 일가를 무너뜨린 것은 공교롭게도 조현아의 동생 조현민 진에어 부사장의 물컵 사건이었다. 첫 보도는 오마이뉴스에서 터져 나왔지만 수많은 익명 제보가 쏟아지면서 조씨 일가의 갑질의 실체가 드러났다.

익명의 대한항공 직원이 카카오톡 제보방을 만들었고 순식간에 수천 명의 직원들이 가입해 조씨 일가의 비리를 쏟아내고 있다. 대규모 촛불 집회가 벌어졌고 일부에서는 우리사주조합을 동원해 의결권 행사에 나설 움직임도 보인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다른 대기업들도 떨고 있다. 만약 한국에서 재벌 체제가 종식된다면 그 출발은 조현민 물컵 사건과 대한항공 직원들의 제보에서 시작될 거라는 기대도 가능하다.

4. 한국 언론의 지형.

우리는 언론이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진실이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언제나 사실이 진실을 구성하지만 사실이 곧 진실은 아니고 취사선택된 편집된 사실이 진실을 배반하는 경우도 많다. 권력을 감시 비판하고 부정 부패를 들춰내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지만 언론사는 스스로의 이해관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언론 역시 플레이어 가운데 하나고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보수가 돈이 된다. 기득권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게 장사가 된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여전히 자본권력이 언론의 밥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고 오히려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건 쉽지만 자본권력을 비판하기는 어렵다고 말하곤 했는데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언론은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모두에 무력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언론은 달라진 게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몇 가지 사건을 다시 구성해 보자.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둔 2012년 12월11일, 민주당이 국가정보원 직원 김하영씨의 오피스텔을 급습했다. 국가정보원이 댓글 부대를 운영하고 조직적으로 여론을 조작한 정황이 드러났다. 그리고 사흘 뒤 12월14일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본부장이 박근혜 당시 후보의 선거 유세에서 난데 없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해 여론을 뒤흔들었다.

이 모든 사건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통합진보당 내란 음모 사건을 터뜨린 것도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을 수사하던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의 혼외 자식 의혹을 폭로한 것도 국가정보원이었다. 헌법재판소가 일정을 앞당겨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린 날은 정윤회 국정 개입 관련 보도가 쏟아지던 무렵이었다. 상당수 언론이 공동정범으로 여론 조작에 가담했다. 보수 언론은 프레임을 뒤집고 본질을 호도하고 물을 탔다.

박근혜의 한나라당 대표 시절 대변인을 지냈던 전여옥이 이런 말을 했다. “결정을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길래 ‘전화라도 해보라’고 권했는데 정말 전화를 했다. 힘이 쫙 빠지더라.” 박근혜가 최순실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변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연설문이 어딘가 갔다 오면 걸레가 돼서 돌아오더라”고 했을 정도다.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박근혜의 실체는 정권 말 레임덕이 되고 나서야 드러났다.

TV조선은 이미 2016년 4월부터 최순실을 추적했고 7월17일 단독 인터뷰를 땄다. 그러나 계속 묵혀 두고 있다가 10월25일 JTBC가 최순실의 태블릿 컴퓨터를 입수해 보도한 다음날에야 인터뷰 영상을 공개했다. 7월18일 우병우 처가의 수상쩍은 부동산 거래 의혹을 보도한 것도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죽은 권력’ 박근혜를 제거할 기회를 노렸고 때가 되자 ‘내부자들’에서 심판자로 잽싸게 변신했다. 결국 실패했지만 거의 성공할 뻔했다.

1000만 촛불이 아니었다면 박근혜는 적당히 찌그러져 레임덕으로 버티고 조선일보는 박근혜를 찍어누르면서 새로운 아바타를 내세워 보수 결집에 성공했을 수도 있다. 촛불의 승리를 민주주의의 쾌거라고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만 언론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자 증세를 세금 폭탄이라고 부르고 쉬운 해고 확대를 노동 개혁이라고 노동 시장 유연화라고 부르던 언론이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신문사가 문을 닫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문을 닫기는커녕 신문사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이게 의미하는 게 뭔가. 광고 시장이 죽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기업들이 보험을 들 듯 언론을 광고로 길들이면서 기사를 거래하고 있다. 광고 효과는 거의 없지만 여론을 통제하는 비용으로는 결코 큰 금액이 아니다. 줄어든 광고 이상의 협찬과 후원으로 언론에 뒷돈을 대고 있다는 것도 이 바닥 업자들만 아는 불편한 진실이다.

집단 백혈병 사태로 수백 명의 피해자들이 호소하고 있지만 삼성은 피해를 보상하기 보다는 언론에 돈을 바르는 쪽을 선택했다. 반올림은 한국 언론의 아킬레스 건이면서 리트머스 시험지다. 2017년 11월16일이 반올림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피해자들이 사과와 배상, 재발 방지를 요구하고 있지만 삼성은 조정위원회 권고안을 무시하고 협상 테이블을 걷어찼다. 언론만 콘트롤하면 한국에서는 뉴스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여론을 뒤집는 것도 가능하다.

이재용이 삼성물산 합병을 찬성해 달라며 최순실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감옥에 가 있지만 어느 언론도 당시 보도를 반성하지 않고 있다. “투기자본이 국부를 빼간다”며 “국민연금 역할론이 대두되고 있다”고 부추겼던 언론이 아직까지도 “국민연금이 합병을 반대했다면 1조원 이상 손실을 봤을 것”이라며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 이재용이 구속되니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라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이런데도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나.

저널리즘의 추락은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진다. 종이신문의 타락도 큰 문제지만 온라인 저널리즘 역시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값싼 트래픽과 맞바꾼 어뷰징 기사가 넘쳐난다. 진짜 중요한 기사를 쓰레기로 뒤덮고 있는 형국이다. 가뜩이나 네이버의 공짜 뉴스 덕분에 한국은 언론사 사이트 직접 방문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가 됐다. 맥락을 잃고 파편으로 떠도는 뉴스, 당연히 브랜드 인지도도 세계에서 가장 낮다.

광고 시장은 급격히 위축될 것이다. 자본권력과 언론의 기묘한 공존공생도 얼마 남지 않았다. 브랜드 저널리즘과 브랜디드 콘텐츠가 언론의 존립 기반을 뒤흔들 것이다. 이제 누구나 미디어를 조직하고 직접 대중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파이프라인의 시대가 끝나고 본격적인 플랫폼 혁명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생존을 위한 혁신을 서둘러야 할 때지만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낡은 관행과 유착에 목을 매고 있다.

광고를 팔던 언론이 언젠가부터 지면을 팔고 있다. 언론에 거는 독자들의 마지막 기대를 걷어차고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행위다. 기사를 거래하는 것도 그나마 언론의 신뢰와 권위가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이런 추세라면 급격히 그 가치가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흔히 기업들이 보험을 든다고 말하지만 보험으로서의 광고나 협찬도 그 효력이 예전 같지 못하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길들여진 맹수가 뭐가 무섭겠는가.

한국의 저널리즘 생태계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양쪽에서 무너져 있다. 오프라인은 언론과 광고주의 결탁이 참담할 지경이고 온라인은 뉴스의 파편화와 클릭 바이트 어뷰징 경쟁이 저널리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한국이 언론 신뢰도 조사에서 세계 최저 수준을 기록한 것은 언론이 자초한 바가 크지만 구조적으로 저널리즘의 위기가 민주주의의 위기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5. 세상을 바꾸는 도구, 시민에게 미디어를.

청와대가 직접 페이스북 라이브를 시작하자 춘추관 기자들이 항의를 했다. 기자들을 건너 뛰고 직접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야기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청와대는 매체가 아니고 기자들과 경쟁할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답변했다. 미디어오늘이 이 사실을 보도한 뒤 청와대 국민 청원에는 청와대 출입 기자단을 폐쇄해 달라는 청원이 쏟아졌다.

청와대 뉴미디어 비서관실의 일련의 실험은 이른바 브랜드 스토리텔링이 기업의 마케팅 채널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지형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하게 한다. 이제 누군가가 메시지를 대신 전달해 주는 시대가 아니다. 메시지를 갖고 있다면 직접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카드뉴스를 만들거나 동영상을 만들거나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나 채널은 얼마든지 있고 효과적인 스토리텔링 기법도 넘쳐난다.

미국의 나사(항공우주국)은 30명의 소셜 미디어 담당자들이 700여 개의 채널을 동시에 운영한다. 국민들의 삶에 끼어든다는 게 이들의 목표고 전략이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뜨면 인터스텔라와 관련된 트윗을 쏟아낸다. 복잡한 연구 결과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계속해서 이벤트를 만들고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은다. 보도자료를 뿌리고 언론을 통해 독자들을 만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수백만 수천만 명을 만날 수 있는데 보도자료가 무슨 필요가 있겠나.

미국의 병원 체인 클리블랜드 클리닉은 헬스허브라는 미디어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편집팀은 날마다 아침 8시30분에 편집회의를 하고 그날의 이슈를 선정해 의사들에게 원고를 청탁한다. 헬스허브는 주류 언론사의 뉴스룸 모델을 흉내내지만 프로패셔널한 스토리텔링으로 확고한 신뢰를 구축하고 있다. 전문가들이 저널리스틱 스토리텔링에 익숙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참고할 만한 사례다.

스타벅스 뉴스룸에서 만드는 ‘업스탠더스’는 커피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는 오리지널 콘텐츠다. 트럼프 체제의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스타벅스가 직접 미디어를 조직하고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건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류 언론이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 뿐만 아니라 코카콜라와 레드불, GE 같은 기업들이 뉴스룸을 만들고 브랜드 저널리즘을 확장하고 있다. 브랜드 저널리즘이란 브랜드 스토리텔링과 저널리즘을 합친 말이다. 코카콜라저니(Journey)로 재미를 본 코카콜라는 “우리의 목표는 보도자료를 없애는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레드불이 만든 ‘레드불레틴(Red Bulletin)’은 익스트림 스포츠의 포털 같은 곳이다. 레드불이 후원하지 않는 스포츠 행사는 격이 떨어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GE는 GE리포트라는 이름으로 GE의 첨단 기술과 혁신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GE리포트의 편집장 토마쉬 케너(Tomas kellner)는 “우리의 경쟁자는 ‘인텔 매거진’이 아니라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와이어드”라면서 “독자들이 뉴스와 브랜드 저널리즘을 구분해서 읽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주류 언론의 기사만큼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일찌감치 현대카드가 ‘채널 현대카드’를 시작했고 CJ가 ‘채널 CJ’, 현대자동차가 ‘HMG저널’, SK는 ‘미디어SK’라는 이름으로 브랜드 스토리텔링을 시도하고 있다. 신세계는 홈페이지를 아예 ‘SSG 블로그’로 대체했다. 아직까지는 외주 업체에 맡기는 곳이 많고 본격적인 브랜드 스토리텔링이라 할 만한 사례는 많지 않지만 기업이 직접 미디어를 조직하고 독자들과 직접 소통하는 건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됐다.

주목할 대목은 기업들이 미디어를 마케팅 채널로 활용하는 것을 넘어 전통적인 저널리즘 기법을 브랜드 전략의 일환으로 차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직은 실험 단계지만 엄청난 자본과 인력을 쏟아부을 것이고 직간접적으로 여론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흔히 브랜드 저널리즘이라고도 부르지만 여기에는 특별히 공익적 가치 판단이나 저널리즘 윤리가 없다. 철저하게 기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메시지의 크기를 조절하는 뿐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미디어가 기업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널리즘이 더 이상 언론의 전유물이 아닌 것처럼 기업이 유사 저널리즘으로 여론을 움직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높은 지지율과 별개로 청와대의 브랜드 스토리텔링은 정치 프로파간다로 전락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미디어의 외형이 확장됐고 새로운 윤리 문제와 사회적 책임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

내가 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치와 기업 뿐만 아니라 시민운동과 사회혁신 파트에서 미디어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5월 광주에서 등사기로 밀어 만들었던 투사회보처럼, 주현우씨의 대자보처럼, 방혜성씨의 노란 리본처럼, 강남역과 구의역에 나붙었던 수많은 포스트잇처럼, 대한항공 노동자들의 카톡처럼, 이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목소리를 내고 소통해야 한다.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시민들은 직접 목소리를 내야 한다. 5월 광주의 시민들은 절박하게 언론의 도움을 호소했다. 자신들이 한 일을 기록으로 남기려 했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철저하게 고립된 상황에서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은 의미 없는 개죽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른 시민들이 그들의 희생을 기억해 주기를 바랐다.

오마이뉴스가 주창했던 시민 저널리즘의 개념은 20년 가까운 시간을 겪으면서 분화되고 진화하고 있다. 단순히 시민들에게 글 쓰는 공간을 내주는 개념을 넘어 이제 누구나 직접 미디어를 조직하고 소유하고 누구나 콘텐츠의 생산과 유통에 참여하는 시대가 됐다. 언론의 역할도 달라졌고 계속해서 달라지고 있다. 이제는 누군가 이름을 불러줘야 꽃이 되던 시절이 아니다. 바야흐로 소셜 뉴스의 시대를 넘어 소셜 커뮤니케이션 시대로 진화하고 있다.

2018년의 한국 사회는 1980년 5월의 고립된 광주와는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말을 잃은 사람들과 말이 있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미투가 터져 나오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거나 평생이 걸렸고 대한항공의 갑질이 뒤늦게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눈물을 삼키며 침묵하는 수많은 을들이 많다. 강남역은 강남역에만 있는 게 아니고 구의역 역시 구의역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거대한 세월호다.

때로는 노란 리본 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누군가가 먼저 든 촛불 하나가 수백만 수천만 명을 이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 튀어나오듯 언론이 침묵하면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고 누군가가 먼저 분노를 쏟아낸다. 대통령을 끌어내린 나라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수많은 성역과 무소불위의 권력이 군림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안의 잠재된 힘을 믿는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더 나은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이다.

사람들에게 미디어라는 세상을 바꾸는 도구를 가르쳐야 한다. 미디어 소비자 또는 미디어 수용자를 넘어 직접 미디어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누구나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좀 더 개방적이고 평등한 미디어 플랫폼을 구상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모두 투사회보가 필요하다. 가두방송을 할 수 있는 스피커도 필요하다. 밤새 등사기를 밀던 그 시절보다 훨씬 더 쉽게 우리는 수백만 수천만을 만날 수 있는 플랫폼을 이미 확보하고 있다.

언론의 책임을 묻고 성찰을 요구하는 것과 동시에 대안 언론의 실험을 지원하고 지속가능한 저널리즘 생태계를 위한 해법을 고민할 필요도 있다. 닷페이스의 HIM 프로젝트를 보라. 여전히 우리 사회의 누군가는 투사회보를 만드는 심정으로 메시지를 만들고 연대와 소통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변화는 주류 언론의 외부에서 올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한국 사회를 좀 더 나은 사회로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leejeonghwan.com audio
Voiced by Amazon Polly

Similar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