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생부가 곧 뜬다. 7일 금융감독원은 중대형 건설사와 중소 조선사 111개 가운데 구조조정 대상을 선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금감원은 주요 은행들에 92개 건설사와 19개 중소 조선사를 우선 평가해 구조조정 대상을 확정하도록 통보했다. 8일 출범한 채권기관 조정위원회는 1차 구조조정 대상 명단의 최종 확정은 23일 이후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궂은 일을 떠맡게 된 김병주 위원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번 심사대상이 된 건설사 가운데 30% 안팎, 조선사는 절반 이상이 부실징후기업 또는 부실기업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 바 있다. 부실징후기업은 기업개선작업, 부실기업은 퇴출 절차를 밟게 된다. 그러나 심사 기준이 분명하지 않은데다 일정도 촉박하고 자칫 회생 가능한 기업들을 무리하게 퇴출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어 구체적인 구조조정 방안을 놓고 논란이 확산될 전망이다. 벌써부터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번 구조조정은 잠재적 부실을 드러내 불확실성을 해소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퇴출 작업이 진행되면 이들 기업들에 대출을 해준 은행들은 손실이 불가피하겠지만 우선은 부실 확산을 막는 게 급하고 일단 부실기업들을 솎아내고 나면 건실한 기업들에게 자금이 제대로 돌아 경기 회복의 발판을 다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부채비율이 높고 미분양 주택이 많은 건설사들, 수주 실적이 없는 신생 조선사들이 1차적으로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언론 보도를 보면 강력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넘쳐나지만 정작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 대한 논의는 없다. 정부는 민간 주도로 하라며 손을 놓은 상태고 은행들은 이해관계가 엇갈려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불확실성을 해소한다는 명분은 있지만 아직 망하지도 않은 기업들을 퇴출시키기까지는 상당한 반발을 감수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형평성 논란도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결국 이번 구조조정은 “네가 나가야 우리 모두가 산다”는 집단 이기주의 또는 승자 독식주의에서 출발한다. 중소 건설사들과 신생 조선사들의 난립이 금융 불안과 신용 경색을 가중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애초에 위기의 본질이 자산 가격 거품과 과잉 유동성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거품이 빠지면서 유동성이 축소되는 과정인데 정부는 몇몇 희생양들을 골라내는 것으로 위기를 넘어서려고 한다.

부실을 정리해야 한다는 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지만 과연 몇몇 열등생들만 내보내면 나머지는 갑자기 모두 우등생이 되는 것일까. 이를테면 자금 압박에 시달리는 중소 건설사들 좀 퇴출시키면 다시 돈줄이 풀리고 나머지 살아남은 건설사들은 자금 확보에 숨통이 트이게 될까. 그래서 안 팔리던 아파트가 팔리기 시작하고 은행들 재무 건전성도 개선되고 경제도 살아나고 자동차도 다시 잘 팔리게 되면,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일단 퇴출 대상을 골라내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퇴출을 시킨다 해도 나머지 기업들 재무 건전성이 당장 개선되는 것도 아니다. 신용 경색이 해소되고 돈이 돌기 시작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당장은 신용 경색을 푸는 게 당면 과제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경제 전반에 걸쳐 거품을 빼고 시장 참가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본질적인 해법이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가 할 일을 은행들에 떠넘긴 상황인데 과연 과감한 구조정이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어느 한 기업을 퇴출하기로 결정하면 은행들마다 손실 규모가 다를 텐데 자율적인 합의를 끌어내기가 쉽겠느냐는 이야기다. 또한 손실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구조조정이 이뤄진다면 과연 그런 구조조정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기업들 자금난을 덜어주겠다고 만든 채권안정펀드가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도 주목된다. 10조원을 조성하겠다고 밝혔지만 20일이 지나도록 채권 매입규모는 5천억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신용등급이 높은 기업들에 자금이 몰리면서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들은 여전히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과연 이들 기업들을 퇴출시키는 게 신용경색 해소에 어느 정도나 도움이 될까.

언론이 이번 구조조정과 관련해 입장을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복잡한 배경에서다. 중앙일보는 “건설·조선업 구조조정 무산되면 재앙”이라는 사설에서 “살릴 기업과 망할 기업이 뒤섞여 있는 상태에서는 은행이 아무리 돈을 대줘도 그 돈이 기업에 흘러가지 않는다”고 경고했지만 과연 어느 정도나 망할 기업을 추려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중앙일보 뿐만 아니라 어느 언론도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신용경색 해소는 거품이 해소되고 기업실적이 회복될 때 그때 비로소 가능하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나 또는 신용등급이 높은 기업이나 낮은 기업이나 전반적으로 실적 부진과 대규모 손실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부동산을 비롯해 자산 가격 거품이 충분히 빠져야 하고 과잉 생산의 후유증도 해결돼야 한다. 고통스러운 과정이 되겠지만 그 과정을 어떻게 견뎌내느냐가 위기 극복의 핵심이 돼야 한다.

정부는 거품을 꺼뜨리기는커녕 혹시라도 거품이 꺼질까, 거품이 꺼져서 기업들 손실이 늘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양새다. 신용경색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데는 정부의 이런 우유부단한 태도 탓도 있다. 말로만 구조조정을 외칠 뿐 핵심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큰 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해 작은 기업들, 조금이라도 약한 기업들을 내모는 이런 어설픈 구조조정으로 과연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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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1. 안녕하세요. 다음 블로거 상승미소입니다. 항상 이정환님의 지식을 훔쳐가기만 하고 댓글을 남겨놓은 적이 없었네요.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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