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 직후 “시장경제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 무너졌다”면서 “결함을 발견했지만 그 결함이 얼마나 심각하고 영속적인 것인지 알지 못해서 매우 당혹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알렉스 캘리니코스 영국 런던대 킹스칼리지 교수는 최근 출간된 ‘무너지는 환상’에서 서브프라임 사태는 결코 사소한 결함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꼽히는 캘리니코스는 이 책에서 “시장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시장을 만드는데 실패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캘리니코스는 “자본주의는 구조적 딜레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국가가 시장에서 비효율적인 자본들이 일소되도록 자유방임한다면 그 결과는 장기 불황일 것이며 국가가 나서서 자본의 대대적인 가치 저하를 막는다면 과잉 축적과 수익성의 장기적 위기가 계속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캘리니코스는 “2000년대 말의 경제·금융위기는 통제를 벗어난 금융 시스템의 돌발 사고도 아니고 우연한 결과도 아니었다”면서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가 수십년 동안 해결하지 못하고 낑낑댄 근본적 모순이 여지없이 드러난 순간이었다”고 지적했다. 캘리니코스는 “과도한 신용 거품은 미국 경제를 계속 성장하게 하려는 노력이었지만 수익성과 과잉 축적의 만성적 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이 이윤율을 높이려면 노동자들을 더 많이 착취하거나 자본의 가치를 떨어뜨려야 한다. 캘리니코스는 착취율이 높아졌는데도 이윤율이 1950~1960년대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건 자본이 너무 많아서 수익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달리 말하면 파산과 감가상각 등을 통해 자본의 가치가 충분히 떨어지지 않으면 과잉 축적이 지속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캘리니코스는 “진지한 정치경제학이라면 왜 세계 자본주의가 전후에 그렇게 안정적인 고속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진지한 정치경제학이라면 왜 자본주의가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안정적 고속성장을 지속할 수 없었는지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생산과 임금, 고용 수준이 상승하는 장기 성장 국면이 자본주의의 정상이 아니고 이런 수준 상승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위기인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슬라보에 지젝 프랑스 파리8대 교수는 이와 관련, “오늘날 경제위기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과제는 금융 폭락의 책임을 세계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일탈, 즉 느슨한 규제와 거대 금융기관들의 부패 탓으로 돌리는 것”이라면서 “정말 위험한 때는 금융 폭락을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견해가 우리를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게 아니라 계속 꿈을 꾸게 만드는 경우”라고 지적한 바 있다.

캘리니코스는 “자본의 경쟁적 축적 과정에서 경제위기는 빈번하게 일어난다”면서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고유한 경향이고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제한적·일시적 체제일 뿐임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증거”라고 지적한다. 캘리니코스는 “자본가들은 잉여 가치율 즉 임금 대비 이윤을 늘리는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이윤율, 측 총투자 대비 이윤을 늘리는데는 실패했다”면서 “경제 위기는 언젠가 일어날 사고였던 셈”이라고 강조한다.

경제 위기가 자본주의에 내재된 한계고 이를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다면 대안은 뭘까. 캘리니코스는 “우리는 아직 단 한 나라에서도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못했고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대안 사회의 윤곽을 자세히 그리려 하면 할수록 자본주의를 뛰어넘는다는 과업의 어마어마함에 압도당하기 십상”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가장 큰 당면 문제는 반자본주의 급진 좌파들의 만성적 정치적 취약성”이라는 지적도 뼈아프다.

그러나 캘리니코스는 “이번 위기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운영방식으로서의 신자유주의 모두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았다”면서 “이제 시장은 더는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력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지금의 이 기회를 과감하게 붙잡는 사람들은 가능한 것의 영역을 진정으로 넓히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대목도 고무적이고 희망적이다.

캘리니코스는 민주적 계획 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금융시장을 장악하고 경제의 핵심 부문을 노동자의 통제 아래 국유화하고 누진세를 통해 확보한 재원으로 사회복지를 확대하자는 구상이다. 기본소득제도 실천적 대안이 될 수 있다. 기본소득제가 전면 도입되면 임금 노동 외에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 제거되고 노동과 자본의 힘이 노동자 쪽으로 기울게 될 거라는 이야기다.

무너지는 환상 /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 이수현·천경록 옮김 / 책갈피 펴냄 / 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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