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에는 튤립 한 뿌리가 있으면 24톤의 밀과 48톤의 호밀과 살찐 황소 4마리와 살찐 돼지 8마리와, 살찐 양 12마리, 와인 2통, 8길더짜리 맥주 4톤과 버터 2톤, 치즈 1천파운드, 매트리스와 침구가 딸린 침대, 옷감 1스택, 은 술잔 등 모두 2500길더어치 상품을 살 수 있다.” 실제로 과거 문헌에 이런 기록이 남아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황당무계한 일이 과연 어떻게 가능했을까.
17세기 튤립 투기 열풍은 조작됐다고 주장하는 책이 나왔다. 도이체방크의 국제 전략 담당자인 피터 가버는 이 책에서 튤립 구근 하나가 집 한 채 값, 3만3천달러에 팔렸다는 기록이 일부 남아있긴 하지만 출처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일부 희귀 품종의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가격이 크게 올랐다가 공급이 늘어나자 가격 거품이 빠진 건 시장 원리에 따른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는 이야기다.
가버는 우리가 알고 있는 튤립 투기는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며낸 조악한 소설일 뿐이며 이 때문에 네덜란드 경제가 큰 위기를 겪었다는 기록 역시 사실 무근이라고 주장한다. 비싼 가격에 거래됐던 튤립 구근은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희귀 품종들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적정 가격을 찾아갔을 뿐이라는 해석이다. 가버는 18세기 미국의 미시시피 버블과 영국의 남해회사 버블 역시 터무니없는 소설이라고 주장한다.
가버는 “왜 버블의 기원에 의심을 품지 않느냐”고 질문을 던진다. 학문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에 손쉽게 버블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가버는 “투기적 사건을 근원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범주나 대중심리에 의해 형성된 버블의 범주로 밀어넣기 전에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면서 “버블 이론은 단순히 우리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자산가격 운동의 일부에 우리가 붙이는 이름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버블의 역사가 과장되거나 왜곡됐을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주장은 모든 버블을 합리적인 가격 변동으로 둔갑시킨다. 2000년 정보기술 거품이나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 그리고 2005년 이후 우리나라의 부동산 거품 역시 펀더멘털과 수요·공급의 균형에 따른 것이니 투기로 봐서는 안 된다고 합리화할 수도 있다. 시장 참가자들의 투기적 욕망과 비이성적 과열을 간과한, 전형적인 월스트리트 금융 자본의 논리다.
이 사람들은 거품은 결국 빠진다고 말하지 않고 시장은 언제나 옳다고 말한다. 가격이 뛰는 건 시장 참가자들의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이며 적정 가격을 벗어나더라도 결국 제자리를 찾아 가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같은 말이지만 뉘앙스는 전혀 다르다. 이 책은 설명할 수 없는 걸 거품이라고 말하는 건 무책임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걸 거품이 아닌 다른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는지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영문 제목은 ‘Famous first bubbles’.)
버블의 탄생 / 피터 가버 지음 / 이용우 옮김 / 아르케 펴냄 / 1만3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