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렙법안 처리를 내년 총선 이후로 미루자는 주장이 나와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정치권이 여러 언론사들 눈치를 보면서 법안 처리를 미루고 있는 가운데 종합편성채널이 직접 영업을 시작하고 SBS와 MBC까지 은근슬쩍 광고 자회사 설립을 서두르는 등 무법천지가 되고 있지만 여야는 물론이고 시민사회단체들도 아직까지 합의지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총선과 대선을 몇 개월 앞둔 시점에서 여러 이해 관계자들의 손익 계산이 분주한 상황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방송사와 광고주의 광고 직접 영업을 금지하고 종편에 민영 미디어렙을 강제 적용한다는 큰 가이드라인에는 합의했지만 적용 시점을 어느 정도 유예할 것이냐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방송사 지분 한도도 쟁점이다. 한나라당은 1사 1렙 형태에 방송사의 최대 지분을 40%까지 허용하자는 입장이지만 민주당은 1공영 1민영으로 가고 최대 지분을 30%로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반드시 연내 입법을 해야 한다면서도 한나라당 협상안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는 일부 양보를 하더라도 올해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좀 더 현실적인 입장이다. 반면 민주언론시민연합은 타협안을 받아들일 게 아니라 최악의 경우 내년 총선 이후로 미루는 게 낫다고 맞서고 있다. 민언련은 종편의 광고 직접 영업을 단 한 순간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좀 더 원칙적인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세 단체 모두 종편과 SBS·MBC 등이 광고 직접 영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지만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인다. 언론 공공성을 확보하고 광고시장의 혼탁을 막는 가장 바람직한 해법은 MBC를 KBS와 함께 공영 미디어렙에 묶고 SBS와 종편 4사를 민영 미디어렙에 묶어 1공영 1민영 시스템으로 가는 것이지만 한나라당이 다수당인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어렵다는 딜레마가 있다.
이미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종편의 미디어렙 강제 위탁 적용 유예에 합의한 상태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서서 연내 입법이 무산될 경우 당장 내년 1월부터 SBS가 광고 자회사를 가동해 광고 직접 영업을 시작하고 곧 이어 MBC까지 빠져 나가면 한국방송공사(코바코) 시스템이 송두리째 붕괴될 거라는 우려가 있다. 사실상 1사 1렙 체제가 되면서 방송광고 시장이 무한경쟁 체제로 돌입하게 된다.
반면 SBS와 MBC가 입법 공백 상태에서 광고 자회사를 설립하는 걸 막기 위해 서둘러 여야 합의안을 받아들일 경우 최소 2년 이상 종편의 광고 직접 영업이 허용된다. 결국 종편의 직접 영업 규제와 SBS와 MBC의 광고 직접 영업 규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으면 최선이겠지만 현재로서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려 있다. 원칙론과 현실론이 충돌하고 있지만 어느 쪽이든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권 일정도 변수다. 민언련은 연내 입법을 서두를 필요 없이 최악의 경우 내년 총선 이후로 입법을 미뤄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총선은 내년 4월, 차기 국회의 정기회 개원은 9월이다. 개원 직후 논의를 시작하더라도 1년 가까이 입법 공백 상태가 계속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내년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등 야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기약 없이 표류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종편의 광고 직접 영업과 SBS·MBC의 광고 직접 영업,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부작용과 해악이 더 큰가를 두고 입장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SBS가 내년 1월부터 광고 자회사를 가동시키고 코바코 시스템에서 빠져나가면 당장 종교방송과 지역민방 등 취약 매체들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언론노조와 언론연대는 SBS·MBC 규제가 더 시급하다는 입장인데 민언련은 종편 규제 역시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종편은 ‘꽃놀이패’를 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디어렙법 통과가 미뤄지면서 은근슬쩍 직접 영업을 시작한 지금 상황이 최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야 합의안이 그대로 통과돼 2년 이상 유예를 받는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SBS 역시 법안 통과가 미뤄질수록 유리한 상황이다. 반면 MBC 입장에서는 SBS만 빠져나가고 MBC는 코바코 시스템에 남게 되는 상황이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언론노조나 언론연대 등은 여야 합의안에 반대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종편의 미디어렙 강제 위탁 적용 유예는 일정 부분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종편의 시청률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라 직접 영업을 하더라도 파괴력이 크지 않을 거라는 판단도 깔려 있다. 반면 SBS와 MBC가 광고 직접 영업에 뛰어들 경우 방송의 공공성이 붕괴하고 취약 매체들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거라는 우려를 더 크게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정리하면 종편의 미디어렙 강제 위탁을 유예하고 SBS를 민영 미디어렙에 묶는 방향으로 연내 입법을 강행하거나 종편의 강제 위탁이라는 원칙론을 고수하면서 연내 입법을 반대하고 SBS의 광고 직접 영업을 방치하는 두 가지 차선책 가운데 선택을 해야 한다. 야당과 언론노조, 시민사회단체들은 25일 저녁 의견을 수렴해 최종 입장을 정리한다는 계획이다. 원칙론과 현실론이 충돌하고 있지만 어느 쪽이나 희생의 대가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