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경영권 불법승계와 비자금 조성, 정관계 로비 의혹 모두에 대해 책임을 인정했느냐”는 질문에는 “건수에 따라…100% 다 인정은 안 되고”라며 번복했다. 맥락을 따져 보면 앞의 “모든 게 내 책임”이라는 말은 “도의적 책임”이라는 의미일 가능성이 크고 뒤의 “100%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은 일부 법적 책임을 인정한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크다.


이 회장이 5일 삼성 특검의 조사를 받았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특검은 이 회장의 소환으로 할 만큼 했다는 최소한의 명분을 챙기게 됐고 삼성도 수사에 최대한 협조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제 특검은 막바지 수순을 밟게 됐다. 이 회장을 한 차례 더 소환할 가능성도 있지만 조사가 이미 충분히 이뤄졌거나 더 조사해도 나올 것이 많지 않은 상황이다. 특검의 최종 판단만 남았다는 이야기다.

이날 이 회장의 몇 마디 발언에 주목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 회장은 사전에 철저히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자들이 많은 질문을 쏟아냈는데 이 회장의 답변은 ①’기억이 안 난다’ 또는 ‘잘 모르겠다’, ②’아니다’ 또는 ‘그런 적 없다’ 정도에 그쳤고 ③아예 침묵하기도 했다.

기억이 안 난다는 건 긍정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에서 기억하기에 따라, 또는 특검이 명백한 증거를 들이밀면서 추궁할 경우 혐의 사실을 시인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 철저하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부분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내줄 건 내주고 막을 건 철저하게 막는 전략.

이 회장은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당시 계열사들의 실권을 직접 지시했느냐”는 질문에 “기억이 안 난다”고 답변했다. “삼성생명 차명주식이 상속받은 재산이냐”는 질문에는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계열사 비자금 조성을 직접 지시한 사실 있느냐”는 질문에는 “지시한 적 없다”고 답변했다. “정·관계 로비를 직접 지시했느냐”는 질문에도 “그런 적 없다”고 답변했다.

이 회장이 평소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을 아끼는 성격이고 이날 답변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면 이 짧은 문답에서 많은 의미를 짚어낼 수 있다. 이 회장은 비자금 조성이나 정·관계 로비는 자신과 무관하다고 못 박았지만 경영권 불법승계에 관여한 사실은 전면 부정하지 않았다. 이런 추론은 특검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인 비자금이나 정·관계 로비 등은 적당히 덮고 이미 유죄 판결이 난 에버랜드 편법 증여 등과 관련해 조세 포탈 등의 혐의를 인정하는 선에서 끝내는 것 아니냐는 관측과도 맞아 떨어진다.

특검의 소극적인 수사의지에 비춰볼 때 형량이 무거운 배임이나 횡령 보다는 비교적 가벼운 탈세 정도에서 타협을 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은 이런 맥락에서 설득력이 있다.

삼성은 지금까지 경영권 불법 승계와 관련, 허태학, 박노빈 등 전·현직 사장을 동원해 책임을 떠넘겼지만 철저하게 이 회장의 관련 여부는 부정해 왔다. 그러나 특검이 시작되면서 삼성이 내줄 건 내주고 막을 건 막자는 전략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삼성은 특검 수사가 전방위로 압박해오자 전·현직 임원들 명의로 개설된 삼성증권 차명계좌 700여개의 명단을 자발적으로 제출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이와 관련, 이들 차명계좌는 고 이병철 회장의 상속 재산이며 비자금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짜고 치는 고스톱… 탈세는 좀 했지만 배임·횡령은 아니다?

결국 지금까지 흘러나온 정보를 모두 종합해 보면 삼성은 차명계좌는 있지만 비자금과는 무관하고 정·관계 로비도 이 회장이 직접 지시한 바는 없다는 것, 다만 경영권 불법 승계에 대한 책임은 일부 인정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삼성과 특검이 이 같은 내용을 사전 조율했을 가능성은 섣불리 추론하기 어렵지만 지금까지 특검의 수사 진행상황을 보면, 차명계좌의 존재는 확인했지만 그 출처와 용도를 파악하는데 실패했고 정·관계 로비 의혹 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당연히 수사에 진전도 없었다.

이 회장은 이날 “소란을 끼쳐서 대단히 죄송”하고 “그룹 회장이니까 당연히 책임을 느낀다”면서도 “삼성이 범죄집단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다소 단호한 어조로 결백을 강조했다. 이 회장이 내비친 강한 자신감 역시 향후 특검 결과에 대한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다. 그동안 삼성은 1분기가 다 지나도록 경영계획조차 뒤로 미뤄가면서 특검 대책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 특검은 과연 ‘짜고치는 고스톱’이라는 세간의 비난을 불식할만한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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