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신당의 원내 입성을 축하합니다. 저는 다음주 월요일에 심상정 전 진보신당 공동대표를 인터뷰합니다. 이 글은 어제 선거 결과를 보기 전에 쓴 글이라 지금 읽어보니 약간 뜬금없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래도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봅니다.)
수능과 내신 결합한 투표권 계좌 시스템… 정치에 시장 원리를 도입한다면?
정치 불신과 혐오가 늘어날수록 투표장에 가는 열성적인 소수가 판세를 흔들게 되고 침묵하는 다수의 불만은 묵살된다. 어떤 경우든 승자와 패자가 엇갈리고 상당수 유권자들의 투표는 사표가 될 수밖에 없다. 선거는 국민들의 뜻을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을까. 왜 정치는 늘 실망을 안겨주는가.
이런 문제의식에서 투표권 계좌 시스템을 둘러싼 논의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다. 지난 17일 열렸던 사회경제학회 학술대회에서 박지웅 영남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은 수시 투표제와 투표 총량제를 활용해 투표권 회계 시스템을 만들어보자는 참신한 주장을 내놓았다. 정치에 부분적으로 시장 원리를 도입하자는 개념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투표권 계좌 시스템의 핵심은 선거 때마다 한 사람 앞에 한 표씩 부여하지 말고 아예 투표권 계좌를 두고 언제든지 투표권을 꺼내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이다. 은행 계좌에서 현금을 찾아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것처럼 필요한만큼 투표권을 인출해서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게 된다.
투표권 계좌 시스템에서는 1년 내내 언제든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고 마음에 안 들면 최종 집계일 이전에 언제라도 이를 철회할 수 있다. 한꺼번에 10표를 행사할 수도 있고 여기에서 3표를 빼서 다른 투표에 참여할 수도 있다. 투표 결과는 실시간으로 집계돼서 공개되는데 이게 곧 지지율이면서 동시에 주요 정책 현안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도 띈다.
박 연구원은 “지금의 투표 시스템이 선거 당일 성적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수학능력시험이라면 투표권 계좌 시스템은 3년 내내 꾸준히 성적이 집계되는 내신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내신 집계 기간을 어떻게 설정하고 수능과 내신의 비율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를 따로 논의해야겠지만 핵심은 상시적인 평가와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시 투표제와 총량 투표제를 결합하면 효과를 더욱 높일 수 있다. 계좌에 10표가 들어있다면 대통령 선거에 5표, 국회의원 선거에 2표, 교육감 선거에 3표를 나눠서 쓸 수도 있다. 정부의 정책이 마음에 안 든다면 야당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수도 있고 교육 현안이 쏟아져 나올 때는 지지하는 교육감 후보에게 10표를 올인하는 것도 가능하다.
투표권 계좌 시스템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사표가 없다는 것이다. 당선과는 별개로 유권자들은 상대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지지율의 등락은 정치인이나 후보자에게 강력한 압박이 된다. 지금은 일단 당선만 되면 4~5년을 버틸 수 있지만 투표권 계좌 시스템이 도입되면 유권자들의 관심과 지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온라인 전자투표 방식인데다 시간과 장소에 거의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투표율도 끌어올릴 수 있다. 정치와 시장을 비교하면 투표권은 물건을 살 수 있는 화폐가 된다. 지금까지는 4년이나 5년에 한번 물건을 살 수 있었지만 투표권 계좌 시스템에서는 언제든지 물건을 사고 마음에 안들면 반품도 할 수 있다.
언뜻 과열선거를 우려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선거 막판으로 갈수록 결과를 뒤집기 어렵기 때문에 상시적인 선거활동이 필요하게 된다. 유권자들 역시 막연하게 정당만 보고 투표하거나 지역정서에 휘둘리기 보다는 좀 더 꼼꼼하게 정책을 비교 검토하고 지지 또는 철회를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박 연구원은 “흔히 정치를 시장에 비교하곤 하지만 실제로 현실 정치는 공급자 중심이고 당연히 경쟁 제한적이고 사실상 독과점 구조를 형성해 왔다”면서 “지금까지는 내키지 않은 상품을 억지로 구입해야 했지만 시장원리를 일부 적용한다면 품질 개선은 물론이고 소비자들의 선택의 폭이 훨씬 넓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 연구원은 “투표권의 배분이나 구체적인 운영 방안 등 세부적인 절차를 좀 더 고민해야겠지만 핵심은 유권자들의 참여를 끌어내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다른 투표 방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 이를 위해 정치적 상상력과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