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과 노제는 깊은 슬픔과 애도의 분위기 가운데 차분하고 엄숙하게 치러졌다.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정치적으로 잘못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어서 이를 변절시키고 소요사태가 일어나게 될까봐 정말 걱정”이라고 말한데 대해 한명숙 장의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저질적인 정치적 의도”라며 “고인에게 다시 한 번 돌을 던지는 것”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실제로 경찰은 소요사태를 우려한 듯 영결식 전날까지 서울광장을 버스 차벽으로 둘러싸 원천 봉쇄했고 영결식 당일도 인도에 폴리스 라인을 치고 추모객들의 도로 진출을 차단했다. 그러나 영결식이 시작되기 30분 전부터 추모 인파가 몰려들면서 시청 광장과 주변 인도를 가득 메워 폴리스 라인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경찰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는지 폴리스 라인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수십만명의 군중이 몰려들었지만 추모객들은 질서정연하게 움직였고 우려했던 돌발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영결식이 진행되는 동안 세종로 사거리를 막고 선 경찰들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말싸움이 벌어지긴 했지만 다른 시민들이 제지하고 나서면서 큰 충돌은 피했다. 일부 시민들은 “장례식에 중무장을 하고 오는 놈들이 어딨느냐”며 고함을 치기도 했지만 경찰들은 시종일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운구 행렬이 세종로 사거리를 지나 시청 앞 광장으로 들어서면서 진입로를 확보하려는 경찰과 시민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시민들은 “앞쪽에 있는 사람들은 자리에 앉으라”, “다섯걸음씩 뒤로 물러납시다”라며 스스로 질서를 찾는 모습을 보였다. 운구 행렬이 지나갈 때는 사방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지만 운구 행렬로 다가가기 위해 밀치거나 자리를 벗어나는 일도 없었다.
추모객들은 청계광장 인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옥 외벽에 걸린 전광판으로 영결식 장면을 지켜봤는데 한명숙 장의위원장이 조사를 읽을 때 여성들은 물론이고 중년의 남성들도 눈물을 훔치거나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운구 행렬이 지나갈 때는 통곡을 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시민들은 “안녕히 가세요”, “편히 쉬세요”라고 외치면서 종이 비행기를 날리거나 손을 흔들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등에서 나눠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얼굴이 인쇄된 전단이 바닥에 떨어지면 누가 밟을새라 집어드는 모습도 보였다. 곳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생수와 종이 모자, 바닥깔개 등을 나눠줬다. 운구행렬이 시청광장에 들어섰을 때는 전광판으로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도 일제히 기립했다. 시청광장 인근은 노제가 시작된 뒤로 인파가 몰려들어 이동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됐다.
시민들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거센 분노를 표출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입장하는 장면이나 헌화하는 장면에서는 곳곳에서 “우~”하는 야유와 함께 “살인마”, “물러가라”, “꺼져” 등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명박이 노무현을 죽였다, 민주주의도 죽였다”라고 쓰인 팻말을 높이 쳐들고 있는 시민도 눈에 띄었다. 일부 시민들은 경찰 앞에서 “저녁에 추모행사 다 끝나고 보자”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영결식과 노제는 차분하게 치러졌지만 관심이 집중되는 부분은 이날 오후 직장인들이 퇴근한 이후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움직임이다. 주말인 30일에는 용산참사 범대위의 범국민대회와 공공운수연맹 집회가 예정돼 있다. 경찰은 정치적인 집회를 전면 불허한다는 방침이지만 29일 자정까지로 돼 있는 장례기간이 끝난 뒤 시민들이 광장을 순순히 내주고 물러날 것인지는 의문이다.
자칫 노 전 대통령의 추모 인파가 자연스럽게 반정부 시위로 이어져 다음달 2일로 예정된 시민단체연대회의의 시국모임과 다음달 10일로 예정된 100만 촛불계승대회를 거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노제가 끝난 뒤 일부 시민들이 “노무현을 살려내라”, “이명박은 하야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격앙되는 분위기다. “광장을 지켜내자”는 구호까지 등장했다.
슬픔에 빠진 시민들을 더욱 분노케 했던 건 시민들의 광장을 원천 봉쇄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도사를 거부하고 만장 깃대를 대나무로 해서는 안 된다고 강요해서 PVC로 만들게 하거나 영결식장에 노란 스카프 등을 압수하는 등 이명박 정부의 과도한 피해망상과 폭압적인 통제 방식, 그리고 다분히 형식적인 행사 진행 방식이었다. 슬픔이 분노로 바뀌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가 향후 정국 변화의 핵심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