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기획위원 홍세화씨가 3일 ‘아픔’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변명도 해명도 아닌 제목 그대로 아픔을 털어놓는 글인데 중간에 이런 대목이 있다.
“과연 그 누구인가, (김상봉 전남대 교수의 칼럼 게재가 거부된) 이틀 뒤 1면에 사과문을 실은 경향신문과 ‘삼성을 생각한다’의 내용을 사회면 머리기사로 소개하기는 했으나 책 광고는 관행인 할인가격 대신 정상가격을 요구하여 아직 게재되지 않고 있는 한겨레에 내면화한 굴종을 자백하라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나는 그 아픔을 충분히 동감하면서도 동의는 못하겠다. 경향신문은 최소한의 저항이라도 했지만 한겨레의 ‘내면화된 굴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픔’을 느낄 게 아니라 분노를 느껴야 하는 거 아닌가. 한겨레는 경향신문에 김 교수의 칼럼 게재가 거부된 사건에 침묵했다. 출판사가 돈을 내고 광고를 내겠다는데도 여전히 거부하고 있다.
한겨레 기자들은 광고 때문에 삼성의 눈치를 보고 있는 현실을 바로 봐야 한다. 한겨레는 “삼성 광고 없이 가겠다”고 선언했지만 끊임없이 삼성에 매달렸고 광고를 애원했다. 이건희 전 회장을 파파라치하면서 다분히 감정이 섞인 비판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적어도 기사에서는 할 말을 제대로 못한 적 없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경향신문에 싣지 못한 칼럼을 프레시안과 레디앙은 이를 실었다. 이들이라고 삼성 광고가 아쉽지 않았을까. 오마이뉴스도 칼럼을 받았으면서도 이래저래 미루다 결국 싣지 않았다. 한겨레는 침묵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최근 삼성이 광고를 풀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자의든 타의든 시사IN처럼 창간 이래 삼성 광고 없이 버티는 언론사도 있다. 프레시안이나 미디어오늘처럼 삼성과 타협하지 않는 언론사들도 많다. 누구는 어렵지 않나. 그래도 적어도 광고와 무관하게 기자들이 해야 할 이야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내 최대의 광고주인 삼성과 관계가 틀어질 걸 각오하고 기사를 쓰는 것이다.
우리가 한겨레에 듣고 싶은 것은 한겨레가 얼마나 아파하는가가 아니다. 적어도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홍세화씨는 “누가 한겨레에 내면화된 굴종을 자백하라고 비난할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비난하고 싶다. 독자들은 얼마든지 비난할 수 있다고 본다. 내면화된 굴종을 자백하고 벗어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경향신문 기자들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1면에 사고를 냈고 더욱 엄정하게 대기업을 비판하겠다고 독자들과 약속을 했다. 그런데 한겨레는 독자들이 다 아는 일을 숨기려 하고 있다. 한겨레가 김용철 변호사의 광고와 관련해서 공식 언급을 한 것은 홍세화씨의 칼럼이 유일하다. 그런데 그게 “우리도 아프다”고 말하는 게 전부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을 냈던 출판사 관계자 말로는 광고 담당자가 부장에게 떠넘겼고 부장은 국장에게 떠넘겼다고 했다. 광고국장 하는 말이 “왜 이렇게 어려운 숙제를 들고 왔느냐”고 하더니 “우리 2년이나 굶었다, 정말 어려운 숙제다”, 그러더니 평소 출판사 광고 보다 훨씬 비싼 광고료를 요구했다는 이야기다. 광고로 먹고 사는 신문사가 광고를 거부했다.
그래서 이 출판사는 아직도 한겨레에 광고를 내보내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이 책은 입소문을 타고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한겨레가 내놓는 변명은 모두 구차하다. 분명한 건 한겨레가 삼성의 눈치를 보느라 삼성을 비판하는 책의 광고를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편집과 광고는 별개라서 한겨레 기자들은 떳떳한가, 나는 묻고 싶다.
모두가 다 아는데 한겨레는 침묵하고 있다. 그건 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홍세화씨의 칼럼을 보고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든다. 한겨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최근 삼성 광고가 재개됐는데 그게 과연 최근 논조와 무관하다고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 과연 이게 그냥 덮고 지나갈 일인지 묻고 싶다.
(2월24일 경향신문 1면.)
(3월3일 한겨레 35면.)
(3월3일 미디어오늘 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