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딜레마에 빠졌다. 물가가 가파르게 뛰어오르고 있는 가운데 환율이 급격히 떨어져 물가 급등을 부추기고 있다. 실질 금리가 마이너스 수준으로 낮아진 상태에서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릴 경우 외화 유입이 늘어나 원화 가치가 절상되고 환율이 더 떨어지게 된다. 경기 둔화 조짐도 금리 인상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금리를 동결할 수도 올릴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9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지난해 9월 대비 3.6%나 급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3월 3.9% 이후 1년 6개월 만의 최고 기록이다. 8월 대비로는 1.1% 올랐는데 이는 7년 6개월 만의 최고 기록이다. 소비자 물가가 2% 수준에서 안정될 것이라는 한은의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 상승 속도다. 특히 배추값이 지난달 대비 60.9%, 지난해 같은 달 대비로는 118.9%씩 치솟는 등 물가 급등을 견인했다.
물가가 급등하면서 지난달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를 동결했던 한국은행의 압박도 커지고 있다. 당장 다음주 금통위 회의에서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동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금리 인상의 적절한 타이밍을 놓친 것 아니냐는 비판도 확산되고 있다. 선제적 대응에 실패하면서 자칫 정부 정책이 먹혀들지 않는 상황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시장에서는 지난달 한은이 금리를 인상할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당초 김중수 총재가 여러 차례 금리 인상 가능성을 흘린데다 물가와 환율 등 제반 여건이 금리 인상 쪽으로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가 8월 29일 DTI(총부채상환비율)을 한시적으로 폐지하는 등 부동산 경기 진작에 올인하자 한은도 이를 마냥 무시할 수 없게 됐다. 결국 부동산을 살리기 위해 정책 기조를 꺾은 셈인데 이 때문에 한은의 신뢰도 크게 손상됐다.
대외적인 여건도 결코 우호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미국과 중국, 일본 등이 환율 전쟁에 나서면서 상대적으로 원화 가치가 뛰어오르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환율 조작을 규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일본도 노골적으로 환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싱가포르와 태국 등도 외환시장 개입을 검토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경기 둔화가 가시화되자 너도나도 환율을 올려 수출 경쟁력 확보에 나선 상황이다.
결국 우리 경제는 뛰는 물가와 낮은 환율, 경기 둔화의 삼중고에 직면해 있는 셈인데 현재 상황에서는 어느 것도 한동안 개선될 조짐이 안 보인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릴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지난달로 끝났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자칫 물가는 뛰어오르는데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거나 기준금리를 인상했는데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주식과 채권 투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어느 순간 상황이 뒤바뀌고 외국인들이 갑자기 빠져나갈 경우 엄청난 충격이 불어 닥치고 또 다른 외환위기가 불어 닥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환율이 고꾸라지면서 수출 경쟁력 둔화도 불가피하게 됐다. 한은은 환율의 급격한 쏠림현상을 막는다는 방침이지만 3천억달러 수준으로 불어난 외환보유액이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언론의 호들갑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정작 냉철한 비판과 대안 제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동안 상당수 보수·경제지들이 기준금리 동결과 적극적인 경기확장 정책을 주문해 왔던 걸 돌아보면 이들 언론 역시 최근 상황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국민일보가 4일 사설에서 “한은은 물가 불안을 조기에 차단키 위해 기준금리 인상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 돋보일 뿐 대부분 언론은 아무런 해법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세계 경제의 불균형 해소를 위해 보다 과감하게 환율을 시장 흐름에 맡겨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기업 입장에서 “우선적으로 환율 급락을 저지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경제나 서민 경제를 고려해 “경제 정책의 최우선 목표를 물가안정에 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겨레 역시 근본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