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들 논술 잡지, ‘이슈&’에 쓴 글입니다. 정리 차원에서.)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트위터에서 스타급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인이다. 재벌 대기업 최고 경영자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는 건 분명 신기한 경험이다. 1968년생인 그는 젊고 유머려스하며 늘 여유만만하고 호탈하게 웃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트위터 팔로워가 7만5천명이 넘는데 시시콜콜한 질문을 던져도 귀찮아하지 않고 직접 답변을 해주는 친절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호된 유명세를 치른 사건이 있었다.
그의 팔로워 가운데 한 명이 어느 날 신세계 이마트가 피자 매장을 개설한 것을 두고 “자영업자들 피 말리는 치졸한 짓”이라고 비판하자 정 부회장은 “그건 어차피 고객의 선택”이라면서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느냐”고 맞받아쳤다. “마트에 가면 떡볶이와 오뎅, 국수, 튀김 등 안 파는 게 없는데 왜 피자만 문제냐”고 반박하기도 했다. 싸고 맛있으니까 사람들이 몰려드는 건데 뭐가 문제냐는 반응이었다.
논쟁은 이마트를 비롯해 대형 할인마트의 기업형 슈퍼마켓(SSM) 진출을 둘러싼 논쟁으로 확산됐다. 역시 트위터에서 나우콤 문용식 대표가 “구멍가게를 울리는 짓이나 하지 말라”고 공격하자 정 부회장은 문 대표의 대학시절 학생운동 전력을 거론하면서 “감옥까지 갔다 오신 분”이라며 “그럴 만도 하다”고 비꼬았다. 정 부회장은 “유통업 자체를 부정한다”면서 문 대표의 비판을 일축했다.
SSM 규제와 관련, 국회에서는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과 대·중소기업상생법(상생법)이 논란이 되고 있다. 유통법은 재래시장 반경 500m 이내에 SSM 진입을 규제하는 법이고 상생법은 대기업 투자 지분이 51% 이상인 SSM 가맹점의 사업정지를 중소기업청에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국회는 지난 10일 유통법을 통과시켰지만 상생법은 한나라당의 반대로 일단 보류된 상태다.
정 부회장의 지적처럼 많은 사람들이 대기업이 골목상권까지 파고드는 걸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피자를 사먹을 때는 싸고 맛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마트 피자 매장은 5시간 이상 기다려야 될 정도로 주문이 밀려든다. 많은 사람들이 어두침침하고 먼지도 많고 비싸기까지 한 동네 구멍가게가 문을 닫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깝다고 해서 굳이 더 비싸게 사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형 유통기업들이 SSM 사업에 뛰어든 건 2007년부터다. 지난 한 해 동안 200개 이상의 SSM이 개설된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에도 114개의 SSM이 늘어났다. 빅3 기업의 슈퍼마켓 시장 점유율은 2006년 6.2%에서 지난해 11.2%로 껑충 뛰었다. 반면 150㎡이하 소형 슈퍼마켓의 점포수는 지난해 기준으로 7만9천여개로 2005년 대비 2만개 이상 줄어들었다. SSM 인근 소매 점포들의 매출액은 평균 48%가 줄어든 것으로 집계된 바 있다.
한나라당은 상생법이 한-EU(유럽연합) FTA(자유무역협정)에 배치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이미 비슷한 규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 홈플러스의 대주주인 영국의 테스코가 상생법의 통과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는데 이 때문에 유럽 중소상인들을 보호하면서 국내 중소상인들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외교통상부가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벨기에와 불가리아, 덴마크 등 EU 소속 6개 나라에서 백화점을 설립할 경우 경제적 수요심사를 받도록 하는 조항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전용면적 300㎡ 이상, 독일에서는 전용면적 800㎡ 이상의 소매시설을 개점할 때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 벨기에에서도 도시에서는 1000㎡ 이상, 시골에서는 400㎡ 이상의 소매시설이 허가시설로 규제되고 있다.
대형 할인마트의 영업시간 규제도 일반적이다. 독일에서 일요일과 공휴일에 폐점해야 하고 평일과 토요일에는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만 개점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도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폐점해야 하며 평일과 토요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만 개점이 허용된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일요일에만 폐점하면 된다. 영국에서는 일요일에는 10~18시 중 6시간만 영업이 가능하다.
이처럼 시장원리에 위배되는 규제를 두고 있는 건 중소 자영업자들을 보호할 최소한의 보호장치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 때문이다. 당장 소비자들은 품질 좋은 상품을 싸게 살 수 있어 좋겠지만 대형 할인마트를 아무런 규제 없이 풀어둘 경우 골목상권이 무너지고 수많은 실업자들을 양산하게 된다. 장기적으로는 독과점의 문제도 우려된다.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들의 몫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나라당이 한-EU FTA 때문에 상생법을 통과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EU FTA에서 상생법은 핵심 쟁점이 아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유럽에 진출할 때는 규제를 받게 되는데 유럽 기업들이 국내에서 규제를 풀어달라고 말하는 것도 형평성에 어긋난다. 국회 안팎에서는 한-EU FTA는 핑계일 뿐 한나라당이 상생법을 반대하는 건 국내 대기업들의 로비 때문 아니냐는 관측까지 제기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대형 할인마트 체인인 월마트가 유통시장을 장악하면서 월마타이제이션(월마트화, Walmartization)이라는 현상이 생겨났다. 월마트가 중국의 값싼 제품을 들여오면서 미국의 제조업 공장들이 잇따라 문을 닫았다. 월마트는 끊임없이 납품단가를 낮출 걸 요구하면서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공장들을 최저가격을 위한 불가능한 경쟁에 몰아넣었다. 월마트 노동자들 역시 대부분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고 있다.
유통법과 상생법은 경제의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제다. 유통법이 이미 통과됐지만 전통시장에서 500m만 떨어져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고 상생법이 통과된다고 해도 SSM을 전면 규제할 수는 없으며 이미 진출한 SSM 점포들 문을 닫게 만들 수도 없다. 다만 최소한 피해를 호소할 근거가 생긴다는 정도다. 좀 더 적극적인 권리 보호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당장 지금은 이 정도라도 시급하다는 게 중소영세상인들의 절박한 호소다.
누구나 품질 좋은 제품을 싸게 사고 싶어 하지만 중소영세상인들에게 최소한의 이윤도 보장하지 않는 이런 시스템에서는 자본력을 갖춘 거대기업들이 유통업과 제조업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이웃들은 길거리로 나앉고 그 사회적 비용을 우리 모두가 함께 부담해야 한다. 우리가 일부러 비싼 동네 구멍가게를 찾기는 쉽지 않지만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제와 여기에 필요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는 있다.
이 모든 논쟁의 중심에 있는 이마트 피자는 단순히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을 넘어 좀 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이마트에 입점해 피자를 판매하는 조선호텔베이커리라는 회사는 정 부회장의 동생인 정유경씨가 45%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사실상 개인회사다. 만약 이마트가 직접 피자 사업을 한다면 신세계 주주들에게 돌아갈 이익이 정씨의 회사로 들어가는 셈이다. 이는 명백한 회사기회 유용이고 배임의 소지도 있다.
이마트가 싸고 맛있는 피자를 만들기 시작하면 주변의 피자가게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된다. 이들은 다른 식당을 차리거나 아예 다른 동네로 옮겨가거나 하겠지만 이처럼 거대 자본이 골목상권을 치고 들어오면 어디에서도 버틸 수가 없게 된다. 문제는 이처럼 골목상권을 무너뜨리면서 벌어들인 돈이 어디로 가느냐다. 이마트 피자는 우리 시대 양극화의 극단적인 한 단면이다. 이념과는 무관한 상식의 문제다.
중소영세상인들의 요구는 대단한 게 아니다. 거대 자본이 사업을 확장할 때는 사업성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상권에 미칠 영향을 사전에 충분히 검토하도록, 피해가 지나치게 크다고 판단될 경우는 사업을 중단시킬 수 있도록 최소한의 규제를 도입하자는 이야기다. 이건 시장원리에 위반되는 게 아니라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위한 최소한의 원칙과 질서, 그리고 생존권에 대한 절박한 요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