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시장 최대의 ‘큰 손’,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두고 논란이 한창이다. 곽승준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이 지난달 26일 연기금의 의결권을 적극 행사할 것이라고 밝힌 뒤 기업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지나친 경영 간섭으로 기업 가치가 하락할 거라는 게 반대의 명분이다. 최근 한나라당이 의결권소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을 조건으로 찬성 입장을 밝힌 바 있지만 여전히 정권 차원의 기업 길들이기가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대부분 신문들이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권한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면서도 정작 의결권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 성향의 신문들도 독립적이고 투명한 지배구조를 확보해야 한다는 수준의 원론적인 주장에 그치고 있다.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로 운용 수익을 늘릴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넘쳐나지만 정작 연기금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은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대기업들이 정부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권이 몇 차례 바뀌는 과정에서 자본 권력은 대대로 기득권을 세습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이 초과이익공유제 등을 제안했을 때 대기업들이 미덥지근한 반응을 보인 것과 관련, 정부와 여당의 불만도 팽배해 있는 상황이다. 정부가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라는 카드를 들고 나온 건 누가 주인인지 확실하게 알려주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둘째, 그러나 대기업들은 표면적으로 주주권 행사를 반대하지 않는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환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굳이 반대할 명분이 없기도 하고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형식적인 수준에 그칠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삼성과 현대자동차, SK, LG 등 대기업들은 실적 호전에 대한 자신감도 있다. 주가가 계속 오르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자신감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일부 경제지들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경영 간섭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투자만 하고 경영에는 개입하지 말라는 입장인데 이런 주장은 명분도 없을뿐더러 이들이 신봉하는 주주자본주의 원칙에도 위배된다. 이들은 국민연금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면서 기업의 수익성이 저하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논리적으로 모순이 많은 이런 주장은 기업 경영자들이 언론 광고의 최고 결정권자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넷째, 진보 진영의 일반적인 정서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바람직하다면서도 주주권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에 대한 컨센서스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재벌 총수 일가의 전횡을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많지만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얻어낼 것인지, 그 과정에서 운용 수익을 일정 부분 포기해도 좋은지 등에 대한 아무런 가이드라인이 없는 상황이다.

다섯째, 진보진영의 일부 소수 의견이지만 사회적 투자를 적극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채권과 주식 등 금융 투자 비중을 과감히 축소하고 보건 의료와 환경, 노후, 보육, 교육 등 공공복지 부문에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주식 투자의 경우 주주권을 행사하려면 단순히 운용 수익 극대화 차원을 넘어 노동과 환경, 지속가능성 이슈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에 가장 격렬하게 반발하는 신문은 한국경제다. 이 신문은 20일 사설에서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는 필연적으로 관치 혹은 정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면서 “도덕적 해이에 빠져들게 되고 정치 투쟁의 전리품으로 전락하게 마련이며 위원의 선임 등을 둘러싼 줄대기 등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고 경고했다. 이 신문은 “관치 예방은 정부가 손을 뗄 때만 가능하다”면서 “관치 없는 주주권 행사는 너무나 착한 발상”이라고 일축했다.

김정동 연세대 교수는 이 신문 칼럼에서 “주주권을 행사하는 사람은 대리인에 불과하다”면서 “그 대리인은 정치권이 임명할 것이고 임기가 끝나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그는 국민이 아니라 본인과 정권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주주권을 행사할 것”이라면서 “이 제도가 10년만 지속되면 장담컨대 우리나라 기업들의 몰락과 국민연금의 파산 및 국민 경제의 파탄이라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매일경제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이 신문은 20일 사설에서 “국민연금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 가치를 높이고 운용 수익을 극대화하려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그러나 현행 지배구조와 기금 운용 체계를 고수한다면 독립성과 전문성, 책임성에 대한 논란을 피할 수 없다”면서 “기금 운용위원회를 독립시키는 내용의 국민연금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신문들도 매일경제와 비슷한 논조를 보이고 있다. 서울신문은 “연기금 운용은 수익성과 안전성 못지 않게 투명성과 독립성이 담보돼야 한다”면서 “투명성과 독립성을 담보할 수 있는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부터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민일보도 “정부가 연기금의 주주권을 앞세워 대기업의 경영 개입을 시도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면서 “오해를 해소하려면 연기금 지배구조부터 독립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향신문은 “한국 대기업의 문제는 지나친 경영 감시가 아니라 견제 받지 않는 지배주주의 전횡이며, 과다한 공적기능이 아니라 불공정 거래를 일삼는 관행에 있다”면서 “주주권 행사의 당위성은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다만 “공적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가 동반성장 등 삐걱거리는 정부의 특정 정책에 대한 대기업의 참여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은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한겨레도 “연기금의 적극적인 개입은 수익을 높여주고 주식시장을 건전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면서도 “의결권 행사가 정부에 의한 부당한 간섭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신문은 “기금의 주주권 행사는 수익성과 안전성의 잣대로 독립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정책적 판단이 개입돼서는 안 된다”면서 “연기금의 지배구조를 독립적이고 투명하게 만들고, 기업 경영을 견제할 수 있는 전문성부터 갖추는 것이 순서”라고 덧붙였다.

한국경제를 제외하면 대부분 신문들이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는 바람직하지만 정부가 개별 기업의 경영에 개입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는 입장이다. 주주권 행사에 앞서 독립적인 지배구조를 확립하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도 비슷하다. 이들 신문의 주장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공통점은 정작 주주권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기업가치를 높이고 운영수익을 극대화한다는 막연한 목표만 제시돼 있을 뿐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최근 발간한 이슈페이퍼에서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앞서 어떤 철학과 접근방법에 의해 이를 추진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면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의들은 현실에 대한 이해가 결여돼 있다”고 지적했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연구원은 “지배주주가 없는 기업에 한정해서 주주권을 행사한다거나 민간 운용회사에 의결권 행사를 맡기겠다는 정부 방침은 법적으로도 문제가 있고 실효성도 없다”고 주장했다.

과거 소액주주 운동을 이끌었던 경제개혁연대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펀드 행동주의’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인다. 투자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주들이 기업 경영에 개입해 사외 이사나 감사 선임을 요구하고 부실 경영의 책임을 묻거나 경영진을 교체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경제개혁연대 역시 사회책임투자에 대한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주주 이익 극대화를 최선의 가치로 내세울 경우 노동과 환경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장기적인 성장성을 희생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진보진영 학자들이 이른바 연기금 사회주의 또는 연기금 행동주의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근본적으로 주주자본주의라는 틀을 깨지 않는 이상 운용 수익과 사회적 가치가 상충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경영 효율성을 제고해 기업 가치를 높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국민연금의 주식 투자를 수익률 게임으로 보는 발상에서 비롯한다. 과거 참여연대의 소액주주 운동이 일부 대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에 기여한 바는 있지만 그 결과 우리 경제 전반에 주주자본주의와 단기 실적주의를 확산시키고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결과를 불러왔다는 사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오건호 공공사회연구소 연구실장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정당하고 기금운용과 의사결정의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당연히 맞다”면서도 “수익성 확대를 절대적 가치로 놓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오 실장은 “사적 투자자들이야 수익성 극대화가 최대 목표겠지만 공적연금인 국민연금은 사회적 가치를 반영한 사회책임 운용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 실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책임투자(SRI)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설정돼 있다”면서 “단순히 착한 기업에 투자한다는 원칙적인 수준을 넘어 노동과 환경, 사회적 형평성, 동반성장 등의 가치를 포괄하는 좀 더 적극적인 사회적 책임 투자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오 실장은 “특히 지금까지 정부 예산으로 진행해 왔던 공공복지 사업을 연기금에 위탁하고 적정 이윤을 보장해 준다면 상호 윈윈하는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장상환 경상대 교수는 “적립된 연기금을 바탕으로 노동, 환경친화적 주식투자를 통해 주식회사에 대한 노동자와 이해당사자의 주식회사에 대한 교섭력과 연기금 운용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려는 시도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자본주의와 주식회사 제도를 유지하는 한 연기금 수익을 늘리려는 자본가적 이해관계와 더 많은 임금을 받으려는 노동자의 요구가 충돌하므로 연기금 투자 확대로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송원근 경남과학기술대 교수는 “자산 소득자로서 노동자의 지위는 임금 축소라는 희생을 치르고서야 얻은 대가, 즉 부의 이전에 의한 것으로 임금 및 소득 결정에 있어서 포드주의 타협의 여지가 축소되고 주식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송 교수는 산별 기업연금 도입을 통한 고소득과 저소득 노동자들의 연대와 연금자산에 대한 법적 통제권의 확보, 사회적 책임투자 확산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주주 이익 극대화와 공적연금의 사회적 책임을 서로 대립하는 개념으로 보는 흑백논리에도 문제가 있다. 다만 국민연금은 주식시장에 뛰어들기에는 이미 덩치가 너무 크고 설령 운용 수익률을 높인다고 해도 인구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은 될 수 없다. 독립적이고 투명한 지배구조를 확립하는 것도 미룰 수 없는 과제지만 근본적으로 국민연금의 운용 철학을 다시 정립해야 할 시점이다.

국민연금의 적립액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이미 324조원, 2043년이면 2500조원 이상으로 불어날 전망이다. 국민연금은 이미 어항 속의 고래가 됐다. 국민연금의 기대 수익률은 애초에 실현할 수 없는 가공의 이익일 가능성이 크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바람직한 것인가를 논의하기에 앞서 이처럼 국민연금의 주식 투자 비중을 계속 늘려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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