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주가지수가 1000을 넘어설 때가 딱 네번 있었다. 1989년과 1994년, 1999년, 그리고 올해다. 올해는 분위기가 다르다. 지난 세번이 주가 상승의 끝 무렵이었다면 올해는 이제 막 시작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올해는 수급 상황이 좋다. 적립형 펀드를 비롯해 간접투자상품이 크게 늘어났고 갈데 없이 떠돌던 부동자금이 주식시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종합주가지수가 1000을 넘어 안착하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나는 그동안 빈부 격차와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 내수 시장이 살아나지 않는 이상 경제 회복은 없다고 믿어왔다. 경제의 발목을 잡아왔던 구조적인 문제들을 방치하고 이렇게 대충 경제가 살아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설령 경제가 살아나더라도 그런 성장은 한계가 분명하다고 나는 믿는다.

IMF 이후 수많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렸다. 노동 조건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빈부 격차도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다. 대기업은 돈을 벌지만 중소기업은 줄줄이 도산하거나 외국으로 공장을 옮기고 있다.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든다. 소비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다. 소비 능력의 문제를 넘어 가난은 이들은 극단까지 내몰고 있다.

참고 : 통계 그래프로 본 양극화의 실상. (이정환닷컴)

지금,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은 이런 구조적인 문제들을 방치하고도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앞으로도 계속 이들을 버리고 간다는 걸 의미한다.

이헌재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은 부자들이 돈을 써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주장해 왔다. 경제는 곧 심리고 소비 심리가 살아나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논리다. 그런 논리의 이면에는 빈부 격차와 양극화를 방치하고도 나머지 절반, 부자들의 심리만 살아나면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뉴스의 이면 또는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요즘 새삼스럽게 다시 보고 느낀다. 이른 바 주류 다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뉴스가 될 수 없다. 주류 담론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의 절망을 눈여겨 보지 않거나 보지 못한다. 짚고 넘어갈 것은 이제 이들이 결코 소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IMF 이후 우리나라 경제는 이들의 희생을 딛고 성장해 왔다. 희생 당하는 소수는 이미 절대 다수가 될만큼 확산돼 있다. 이들의 희생을 딛고 성장하는 일부가 오히려 소수다.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장의 한계는 곧 희생의 한계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와 금융 세계화 시대에 이미 경제 공동체는 무의미하다. 물론 주가가 1000을 넘어 안착할 수도 있고 외형이나마 경제가 살아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성장은 결국 일부의 몫이다. 정부는 무력하고 분배의 논리는 공허하다.

좀더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와 고민이 필요하다. 아직까지 대안은 막연하고 요원하다. 이대로라면 결코 현실을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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