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6일 치러진 프랑스 대선은 언론을 앞세운 대리전쟁이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좌파신문인 ‘리베라시옹’은 대중운동연합의 니콜라 사르코지를 노골적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사르코지에게 표를 줘서는 안 되는 열 가지 이유”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비슷한 성향의 ‘누벨옵세르바토아’나 ‘마리안느’는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을 공개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르몽드’는 군소후보에게 투표하지 말 것을 권고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드러내놓고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군소후보에게 갈 표를 루아얄에게 몰아달라는 호소였다. 이에 맞서 우파 신문인 ‘르피가로’는 아예 1면 머리기사에 사르코지의 사진을 내걸고 “왜 사르코지를 증오하는가”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좌파 신문이 우파 후보를 지지했던 사연.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2002년의 프랑스 대선은 더욱 드라마틱했다. 군소 후보들이 난립한 탓에 예선 투표에서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이 떨어지고 우파인 자크 시라크와 엉뚱하게도 극우파인 장 마리 르펭이 결선 투표에 진출하게 된 것. 사회당이 33년 만에 후보를 내지 못하면서 자칫 극우파가 정권을 잡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프랑스 언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르펭의 당선만은 막아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은다. 그래서 좌파 신문들까지도 공개적으로 우파 후보를 지지하기에 이른다. 방송사들은 르펭의 TV 토론 출연을 허용할 것인가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언론이 주장을 밝히는 것을 넘어 선거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낙선운동이 거세지자 이를 반영하기 위해 기존의 규칙들을 수정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극우파를 막아내자”는 발언을 시라크의 지지 발언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한 것 등이다. 방송사의 경우 이런 발언을 빼고 나면 시라크의 지지 발언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르펭 지지자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프랑스 대선의 몇 차례 경험은 선거 보도에서 언론의 중립과 공정성 문제를 다시 고민하게 한다. 극우파의 당선을 막자는 명분은 그럴듯했지만 그런 명분이 중립과 공정성을 포기한데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었다. 결국 그해 봄 프랑스 민주주의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정당한 투표로 선출된 결선 투표 후보를 언론이 배제해 버린 끔찍한 경험이었다.

프랑스 언론은 사설을 통해 지지 후보를 공개하는 것을 암묵적인 원칙으로 하고 있다. 지지 후보를 결정하는 과정도 까다롭다. 편집국 고위 간부들 뿐만 아니라 안팎으로 광범위한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친다. 사설에서는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더라도 일반 기사에서는 엄격하게 공정성을 지킨다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주장과 사실의 전달을 분리한다는 이런 원칙이 늘 엄격히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올해 5월 대선 결과, 우파 후보가 당선되자 ‘리베라시옹’은 “괴로운(Dur)…”이라고 제목을 뽑았다. 실망감을 그대로 반영한 기사였다. ‘르피가로’는 “좌석 벨트를 꼭 붙들어 매라”고 쓰기도 했다. 나라 전체가 흔들릴 게 뻔하다는 의미에서다.

문제는 이런 정치적 입장들이 기사에도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연구 결과 공개 지지를 밝힌 후보에 대한 기사 비중이 다른 후보들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2002년 대선의 경험처럼 언론이 선거 결과에 개입하는 사태가 재발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프랑스는 특히 방송에서 후보들의 발언시간과 출연시간 등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흔히 3등분 원칙이라고 하는데 정부와 여당, 야당에 동일하게 시간이 배분돼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되 지나친 편파 보도를 막겠다는 원칙인데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입장은 밝히되 개입은 하지 않는다?

이런 고민은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일찌감치 언론이 지지 후보를 밝히는 것이 오래된 전통으로 굳어져 왔다. 1996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의 415개 일간지 가운데 301개가 지지후보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신문들은 모두 주장과 사실의 보도를 분리한다는 원칙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즈’는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를 공개 지지했고 ‘워싱턴타임즈’와 ‘시카고트리뷴’은 공화당의 조지 부시를 공개 지지했다. ‘LA타임즈’는 이례적으로 지지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밝혔다. 2004년 대선에서도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즈’는 민주당의 존 캐리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는 사설에서 부시와 케리의 장점과 단점을 지적한 뒤 “이 모든 걸 종합하면 역시 케리가 더 나은 대안”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워싱턴타임즈’는 “부시는 대선 대통령의 자격이 충분하다”며 “위기의 시대에 케리는 부적합한 지도자”라고 맞섰다. 문제는 이런 사설이 사설에 그치지 않고 기사의 영역까지 넘나든다는데 있다.

2004년 대선 직후 나온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부시의 경우 관련 기사의 59%가 부정적이었던 반면 케리는 25%만 부정적이었다. 양적 측면에서는 두 후보가 비슷했지만 기사의 시각이 애초에 달랐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긍정적인 관점의 기사는 부시가 14%에 그쳤고 케리는 34%나 됐다. 정치적 편향이 사설 뿐만 아니라 기사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는 이야기다.

그해 대선에서는 프랑스의 ‘르몽드’가 케리를 공개적으로 지지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외국 언론이 미국 대선에 개입한 것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르몽드’는 사설에서 “케리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 ‘미국의 국경을 넘어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부시는 이 신문이 “50년 동안 자리 잡았던 국제 질서를 무너뜨렸다”며 분개했다.

2000년에도 비슷했다. 대다수의 언론이 부시의 편에 섰다는 사실이 달랐을 뿐이다. 부시의 기사는 25%가 명확하게 긍정적이었던 반면 고어의 기사는 13%만 긍정적이었다. 부정적인 기사는 부시가 49%, 고어가 56%로 나타났다. 두 사람을 동시에 다룬 기사에서도 부시에게 부정적인 기사는 8%였는데 고어에게 부정적인 기사는 12%나 됐다.

의원내각제를 실시하는 영국 언론은 특정 후보보다는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힌다. 전통적으로 ‘타임즈’는 보수당을, ‘가디언’과 ‘선’은 노동당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신문과 달리 영국의 방송은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의 방송사들은 공영 방송이라는 원칙에 따라 정당에 무료로 정치 광고를 허용하고 있기도 하다.

독일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경우다. 중립과 공정성을 강조하면서도 특정 정당이나 후보에 편파적인 기사를 싣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슈피겔’은 전통적으로 좌파 정당인 사민당이나 녹색당의 정책을 지지해왔지만 공개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히지는 않는다. 다만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지지를 표명한다.

2002년 총선에서 ‘파이낸셜타임즈’ 독일판이 우파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영국에 본사를 둔 이 신문은 본사의 전통을 따라 지지 후보를 공개했지만 내부적으로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전혀 다른 관점의 사설을 며칠의 시차를 두고 다시 싣게 된다.

이 해프닝은 독일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다른 언론들은 ‘파이낸셜타임즈’가 독일판을 창간하면서 초기에 인지도를 확보하려는 저급한 상술에서 벌인 일이라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언론사가 지지 후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고민도 안겨줬다.

언론의 선거 개입, 무엇이 문제인가.

외국의 사례를 돌아보면 언론의 객관성이라는 게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 반문하게 된다. 언론이 정치적 입장을 배제할 수 있을까. 배제할 수 없다면 그 정치적 입장과 보도의 공정성은 어떻게 동시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언론이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그리고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우리나라는 선거법에 따라 언론이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낙선시킬 의도로 비판할 수 없도록 돼 있다.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조항이고 선거 때마다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조항이다. 대부분의 언론이 특정 후보에 편향적인 기사를 내보내면서도 표면적으로는 기계적 중립을 유지하는 이중성을 보이는 것도 이 조항 때문이다.

2002년 대선에서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뉴스’는 새정치국민회의의 노무현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히기로 했다가 법적인 문제에 부딪혀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정 정당과 후보를 지지하는 기사를 내보내면서도 그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힐 수는 없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조선일보’를 비롯해, 이른바 ‘조중동’이나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도 마찬가지다. 독자들은 이미 이 신문들의 정치적 입장을 파악하고 있는데 이 신문들은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느라 목소리를 낮추기 일쑤다. 그러면서도 기사에는 여전히 정치적 편향이 묻어난다. 굳이 외국 언론들과 비교하자면 지지는 하되 입장은 밝히지 않는, 또는 밝히지 못하는 상황이다.

선거 보도가 정책 이슈보다는 판세 분석에 치중되는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정책을 파고 들다보면 아무래도 특정 후보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보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정책 비판보다는 사소한 말 실수나 스캔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언론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가장 대표적인 논리는 권언유착의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히고 나면 오히려 권언유착의 우려를 줄일 수 있다는 의견도 많다. 경마중계식 보도가 아니라 본격적인 정책 대결이 자리 잡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외국의 사례에서 보듯 공개 지지가 최선의 대안은 아니다. 자칫 언론의 선거 개입이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기계적인 중립을 포기하는 순간 언론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선택해야 한다. 그때부터 언론은 관전하는데 그치지 않고 링 안에 뛰어들어 선수로 참여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언론이 정치적 입장을 숨기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주장과 사실의 전달, 이를테면 사설과 기사를 분리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독자들에게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독자들을 선동하려고 하지 말고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관점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 아니던가.

언론이 주장을 선명하게 드러낼 때 독자들도 언론의 편향을 정확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주관을 배제한 완벽하게 객관적인 서술은 불가능하다. 언론은 이를 인정해야 한다.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핵심은 주장과 사실의 전달을 구분하라는 것이다.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실을 가감하거나 왜곡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정환 기자 top@journalismclass.mycafe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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