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버냉키의 굴복과 추락하는 달러 가치… 세계 경제에 먹구름.
“주식시장의 거품을 없애려고 금리를 높이는 것은 쇠망치로 뇌수술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Raising interest rates to fight stock market bubbles is like trying to perform brain surgery with a sledgehammer).”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2002년 프린스턴대 교수 시절 연준에서 했던 강연 가운데 일부분이다. 그는 금리를 낮춰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거나 금리를 올려 거품을 잡는 정책을 모두 반대해 왔다. 금리 정책으로 성장을 견인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연준의 목표가 통화가치 수호와 물가 안정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취임 이후 줄곧 시장 개입의 부작용을 경계해왔다.
그랬던 그가 지난 18일 연방기금 목표금리를 5.25%에서 4.75%로 50bp나 낮췄다. 지난해 7월 이후 1년 2개월만이다. 쇠망치로 뇌수술을 할 만큼 서브프라임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원칙을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일부에서는 버냉키의 굴욕이라는 비아냥거림도 들린다. 이번 금리 인하는 일단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자산 가격의 하락을 막겠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연준의 금리 인하에 맞춰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주가가 폭등한 것은 금리 인하의 최대 수혜자가 누구인가를 설명해준다. 월 스트리트는 금리 인하를 환호했고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도 버냉키 의장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버냉키는 그동안 서브프라임 사태는 투자의 실패일 뿐 펀더멘털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그러나 시장의 압력을 견뎌내지 못했고 결국 원칙을 포기했다. 그가 여러차례 항변했던 것처럼 이번 금리 인하는 투자의 실패를 연준이 보상해주는 결과가 됐다. 부동산 거품을 조장하고 레버리지를 늘려가며 방만한 투자에 나섰던 부동산과 금융 투기세력의 도덕적 해이를 방조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투기세력들 투자 실패를 연준이 보상해 줬다.”
우리가 고민할 문제는 그 부작용이다. 당장 급한 불은 껐지만 미국은 이제 인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하는 판국이다. 달러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수입 물가가 급등하고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시키는 악순환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다. 당장 유로화 대비 달러화 가치가 폭락하기 시작했고 원화 환율도 흔들리고 있다.
달러화가 약세를 보이면서 미국의 쌍둥이 적자는 크게 줄어들었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지난 2005년 국내총생산(GDP)의 6.8% 수준으로 급증했다가 달러화 약세가 지속되면서 올해 2분기 말 5.5%까지 낮아졌다.
달러화 가치가 폭락하면 한국은행은 환율 하락을 방치하거나 미국 국채를 사들여 환율 방어에 나서야 한다. 한은에 따르면 국제 유가가 10% 오르면 성장률이 0.2% 하락하고, 소비자물가가 0.2% 올라간다.
한은의 고민은 깊고도 깊다. 환율 하락을 방치하자니 수출이 타격을 받고 미국 국채의 수익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환율 방어 역시 쉽지 않은 결정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 국채를 내다 팔수도 없는 상황이다. 투매가 시작되면 달러화 가치가 폭락을 거듭하고 자칫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불황이 시작될 가능성도 있다.
미국 국채 투매 시작되면 세계 경제 파국 우려.
달러화 약세와 함께 국제 원자재 값도 폭등하기 시작했다. 원유 수출국 입장에서는 달러화 가치가 떨어지는 만큼 유가를 올려 받고 싶을 것이다. 기축 통화를 유로화로 바꿔야 한다는 논의도 이런 맥락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제 유가는 물론이고 금, 옥수수, 콩, 밀 등 모든 상품이 통제 불가능한 랠리를 시작했다. 가뜩이나 환율이 하락하면 이들 상품의 국내 수입 단가는 더욱 높아진다. 미국의 부실을 다른 나라들이 나눠서 떠안는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중국은 금리를 인상시켜 이른바 ‘글로벌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확산시키고 있다. 금리를 높이면 상대적으로 달러화 대비 가치가 높아진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달러화 대비 위안화의 1일 변동폭을 상하 3%로 제한하고 있다. 인위적으로 위안화의 평가 절상을 막아 왔지만 금리가 올라가면 평가 절상 압력이 더 높아진다.
지난해 중국의 무역수지 흑자는 1775억달러, 2004년의 6배에 이른다. 게다가 외국인 직접투자가 연간 700억달러, 자본수지 흑자도 계속되고 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위안화 가치가 절상되고 중국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고 중국의 수입이 늘어나야 하지만 환율을 붙잡아 두면서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8월 중국의 소비자물가지수는 무려 6.5%나 올랐다. 음식료 가격만 놓고 보면 18.2%나 올랐다. 중국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잡고 과잉 유동성을 흡수하기 위해 올해 들어 5차례나 27bp씩 예금 금리와 대출 금리를 끌어 올렸다.
중국, 디플레이션 수출에서 인플레이션 수출로.
중국 정부도 이제 위안화를 절상해야 한다는 국제 여론을 마냥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환율을 유지하려면 중국 정부는 달러화를 계속 사들이거나 위안화를 절상하거나 선택을 해야 한다. 달러화를 사들이는 것은 한계도 있고 지금 시점에서는 위험하기도 하다. 위안화를 절상한다는 이야기는 중국 제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진다는 이야기다. 중국이 디플레이션 수출국에서 인플레이션 수출국으로 바뀌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더 이상 중국 제품이 싸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세계는 미국의 과잉 소비를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왔다. 다른 나라들은 미국 국채를 사주면서 쌍둥이 적자를 보전하고 달러화 가치 하락을 막아왔다. 미국 정부와 국민들은 저축도 없이 소비를 늘려왔고 세계는 그런 미국에 의존해 왔다. 서브프라임 사태와 연준의 금리 인하는이런 불균형 구조가 결국 한계에 직면했음을 의미한다. 연준은 금융 시장의 안정을 선택했고 결국 세계 경제는 미국발 인플레이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이번 금리 인하가 버냉키가 우려했던 것처럼 쇠망치로 뇌수술을 하는 결과가 될 것인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현재로서는 변수가 많아 어떤 가능성도 섣불리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 경제의 위기는 2000년 이후 저 금리 기조가 만들어낸 과잉 유동성 탓이다. 이번 금리 인하는 과잉 유동성의 부작용을 유동성 공급으로 해결하려는 지극히 단기적인 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가뜩이나 서브프라임 사태는 유동성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신용 경색이 문제였다. 애초에 유동성 공급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대공황 이래 처음으로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고 있고 과연 금리 인하로 이를 막을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다.
분명한 것은 세계적으로 달러화 대비 통화 가치가 절상되고 물가가 치솟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미국 경제의 위기는 한동안 지속될 전망이고 중국의 금리 인상과 맞물려 세계적으로 자산 가격 거품이 확산될 우려도 있다. 최근 일련의 변화는 세계 경제의 불균형이 해소되는 과정일 수도 있고 새로운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미국에 의존하는 성장 모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기업 수출 중심의 성장 전략에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